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세규 Jul 02. 2021

얼마나 못났으면 감히 신하가 인조의 옷자락을 잡겠는가.

제 16대 왕 인조

인조시대의 키워드를 3가지로 잡아본다.

삼전도비, 소현세자, 이괄의 난이다.


<<치욕의 역사, 삼전도비의 훼손>>


2007년 2월 3일 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회색을 머금은 구름이 가득했다. 날씨 탓이었을까. 그는 우울한 마음으로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집을 나섰다.


" 치.. 치.. 치 ~익. 칙칙.. "


빨간색 스프레이가 허공을 한줄기 물처럼 가르며 돌조각 위에 착착 내려앉았다. 철거. 370. 병자. 빨간 글씨가 삼전도비에 그려졌다.


문화재 훼손범 백 모 씨가 그날 밤 삼전도비에 낙서를 한 거다. 얼마나 이비석에 관심이 없었는지 만 하루가 지나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가 낙서한 숫자는 2007년을 기준으로

병자호란이 일어난 지 370년이 흘렀음을 의미한다.

삼전도비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청 태종에서 항복한 기록을 담고 있다.


                   *삼전도 (三田渡)*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 있던 한강 상류의

나루. 병자호란 때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한 곳이며, 청나라의 전승비(戰勝碑)이기도 한 삼전도비(三田渡碑)가 이곳에 세워지면서 더 알려졌다.


                           - 두산 백과 -


조선의 왕이 양손을 땅에 대고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3차례 조아리며 같은 방법으로 3회 반복을 한다. 이렇게 절하는 방법이 청나라의 임금에게 항복을 표하는 예절, 삼배 고두례다. 왕권의 치욕스러운 추락이다.


현대적으로 상상해보자. 만일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중국 주석에게 이런 망신을 당한다면 아마 우리는 속으로 끓어오르는 굴욕감을 참지 못했을 거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봤지만 그 당시로 돌아간다면 임금 아래 신하와 백성들은 얼마나 인조를 원망했을지 그 마음을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인조실록 15년 1월 30일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상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津卒)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상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상전(桑田)에 나아가 진(陣)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상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달하여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御衣)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 이 부분을 주목해보자.


얼마나 왕을 업신여겼으면 신하들이 앞다투어 배에 오르는 과정에서 감히 어의를 잡아당기기까지 했는가. 그만큼 인조의 왕권은 바닥에 내려앉았다.


정약용의 저서인 조선판 국방백서 비어고 (備禦考)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약 50만 명이 청나라로 끌려갔다고 전한다. 그중 20만 명이 여성이었다니 노예로 팔려간 그들의 처참한 모습이 눈에 그려진다.


그때 청나라의 수도 낙양에서는 노예를 매매했는데 어떤 이는 자기 가족을 데려 오려 1500냥의 돈을 지불했다고도 한다.


환향녀라는 단어가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으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온 여인을 뜻한다. 화냥년이란 비속어의 유래다.

겁탈을 당한 여인들은 조선으로 살아서 돌아와도 남편들이 받아주질 않았다.


모진 고생 끝에 돌아온 여인들 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청나라에 끌려갔지만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집안에서 받아주질 않았다니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인조는 쿠데타로 ( 인조반정 ) 왕위에 올랐다. 두 번째 후궁의 아들이 그의 아버지인 정원 군이다. 정통성이 없으니 왕의 힘은 여전히 약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의 배경에는 친명배금 정책이 있었다.


선대 임금 광해군은 국가의 실리를 추구한 중립외교를 했다. 지는 해의 명과 떠오르는 태양 금나라 사이에서 약소국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집권한 서인 세력은 금나라 (청나라로 바뀜)를 오랑캐로 삼고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33세의 (1612 ~ 1645 ) 나이로 생을 떠난 인조의 큰 아들이다. 1636년 병자호란 다음 해 청나라에 9년 동안 인질로 잡혀 있었다.


인조 23년 6월 27일 실록의 기록을 보자.


<소현 세자의 졸곡제(卒哭祭)를 행하였다.>


전일 세자가 선양에 있을 때 집을 지어 단확(丹艧) 145)을 발라서 단장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조선 사람들을 모집하여 둔전(屯田)을 경작해서 곡식을 쌓아 두고는 그것으로 진기한 물품과 무역을 하느라 관소(館所)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으므로, 상이 그 사실을 듣고 불평스럽게 여겼다.


비운의 인물 소현세자는 귀국 후 인조의 미움을 사게 된다. 청나라의 신물품과 경작한 곡식을 무역을 했던 세자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삼배 고두례의 굴욕이 인조에게는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았을 테니 말이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수일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鮮血)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幎目)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변 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藥物)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과 같았다. 그런데 이 사실을 외인(外人)들은 아는 자가 없었고, 상도 알지 못하였다.


당시 종실 진원 군(珍原君) 이세완(李世完)의 아내는 곧 인열 왕후(仁烈王后)의 서제(庶弟)였기 때문에, 세완이 내척(內戚)으로서 세자의 염습(斂襲)에 참여했다가 그 이상한 것을 보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이다.


이렇듯 실록은 소현세자의 염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독살의 가능성에 의문을 품은 거다. 훗날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인 세손 (世孫) 이석철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제주도로 유배를 보냈다. 봉림대군 (제17대 왕)을 세자로 삼았는데 그는 소현세자의 동생이다.


진실은 알 수 없지만 인조는 아들인 소현세자의 독살 정황을 알고도 방관했을 수도 있음은 세손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행적과 실록의 기록을 보고 추측이 가능하다.


임금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인조는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를 왜 그리도 박대했을까. 부정 (父情)이 없었으니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이괄의 난>>


인조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또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있다. 이괄의 난이다.

이괄은 인조반정 시 큰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 ( 論功行賞 )에서 밀려 2등 공신이 된다. 이에 대한 불만도 있었고 정권을 잡은 사람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그는 역모를 꾀한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에 이괄은 반란을 일으켰다. 역사상 처음으로 반군이 수도인 한양을 점령했다.

대대적인 관군의 진압으로 반란은 실패했다. 반군은 흩어졌고 정묘호란 때 후금의 군사들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삼전도비는 방치, 복구, 훼손, 복원 등 여러 차례 이동과 수난을 겪었다. 고증을 통해 원래 있던 자리인 지금의 롯데월드 바로 옆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놀이 공원 근처에 뼈아픈 우리 역사의 흔적이 있다는 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석촌호수길 삼전도비에서 바라본 롯데월드 타워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올라있다. 바닥으로 떨어진 조선의 역사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타워의

모습이 극과 극 선명한 명암의 대비다.

인조는 54세 (1595 ~ 1649) 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26년 (1623 ~1649 )을 왕위에 있었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있는 장릉이 조선 제16대 왕 인조의 능이다.


국가 지도자의 잘못된  기조 정책이 역사와 백성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그를 보고 교훈 삼을 일이다.


이전 15화 파란만장한 인생 광해군과 실록에 기록된 UFO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