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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Jun 23. 2021

선조는 왜 일개 장군에게 절을 하며 머리를 조아렸을까.

제 14대 왕 선조.

열등감이란?


다른 사람에 비하여 자기는 뒤떨어졌다거나 자기에게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인 감정 또는 의식.


- 국어사전 -


살다가 열등감이 심한 사람을 몇 사람 겪어봤다. 특히 직장 상사라면 회사 생활이 녹록지 않다.


이런 이들의 특징은 자신이 모자란다는 불안한 심리가 이상한 사고와 행동으로 나타난다. 즉,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 자칫 팀의 분위기와 성과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선조는 열등감으로 인해 스스로와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 인물이다. 국가 전체로 보면 수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조선 왕조의 역대 왕들 중 가장 무능한 리더였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임진왜란에서 보여준 그의 행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 이 열등감의 원인은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 드라마 징비록에서 선조 역할의 김태우 -


선조가 왕위에 오른 과정부터 살펴보자. 그는 한마디로 정통성이 없는 왕이었다. 선조 이전의 왕들은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들이었지만 그는 조선 최초로 후궁이 낳은 아들, 즉 서얼 출신이었다.


중종 때부터 가계도가 꼬이기 시작한다. 다음 도표를 보자.



중종 (11대 왕) - 인종 (12대 왕, 둘째 왕후의 아들) - 명종 (13대 왕, 셋째 왕후의 아들) - 선조 (14대 왕, 세 번째 후궁의 아들 덕흥 대원군의 셋째 아들 ) 뭔가 복잡하다.


선조의 아버지는 후궁의 아들 덕흥 군이다. 그것도 선조는 덕흥군의 셋째 아들이었으니 어릴 적에 왕이 될 것이라고 꿈도 꾸지 못했을 거다.


집권 초반 어쩌면 선조는 스스로 정통성이 없다는 걸 알기에 왕권을 잡기 위한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는 즉위하자 훈구세력을 밀어내고 4번의 사화로 거의 몰살당한  사림파를 대거 등용시킨다.


이름만 들어도 존경할 만한 이황, 이이 같은 학자들을 스승으로 삼고 매일 경연에 나가 스스로 부족한 점을 채우려 했다고 한다.



-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



류성용, 권율, 허준 같은 사람들을 발탁한 것도 선조였다. 대동법의 전신인 대공 수미 법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다가 선조가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변해갔을까.. 이 시기에 당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고 정여립의 난 이후 동인은 또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다.


정여립은 원래 서인이었나 동인으로 전향을 하면서 반란을 꾀하다가 죽는다.(증거부족으로 당대에서부터 조작이 의심 된다고 한다.) 서인의 수장 정철이 영의정에 오르자 동인 측은 1천 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이 사건이 기축옥사다.


이때 동인들은 선조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나타냈는데 선조는 이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서인의 손을 들어줬다. 왕권 때문에 서인들을 이용해 동인을 제거한 게 아니냐는 설이 있다.


기축옥사는 당쟁의 심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1589년에서 1591년까지 수많은 동인들이 죽어 나갔다.

잠시 선조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에서 사림을 대거 등용시키자 이들은 또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정국을 혼란스럽게 한다. 만일, 왕권에 대한 정통성이 있고 그를 믿으며 따르는 세력이 있었더라면 선조는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았을 거다.


눈만 뜨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림파들과 올바른 정치를 펴 나갈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선조는 대범하지 못하고 신하와 자식인 광해군까지도 의심하는 등 왕으로서 부족한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소심한 기질의 성격을 타고났을 수도 있다.


당쟁이라는 내부 갈등 속에 조선이 혼란스러울 무렵 일본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1592년 일본은 ' 정명가도 '를 명분으로 조선을 쳐들어오고 무방비인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임진왜란의 시작이다.


1592년은 조선 건국으로부터 200년이 되던 해였다. 그 기간 동안 조선은 전쟁이 없었고 평화로웠다. 하지만 너무 안일했다. 붕당으로 나뉘어 서로 싸움하는데 여념이 없는 정권은 국력을 키우는 데 너무 소홀했다.

전쟁을 겪으면서 선조는 지도자의 면모를 잃는다. 명나라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명에서 온 장수들에게 절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왕조 실록 선조 26년(1593) 8월 14일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제독을 접견하여 남쪽의 적세, 방어책을 논하고 예단을 주다.>>


이 제독과 양 부총이 황주에 이르니, 상이 제독에게 재배(再拜)하자 제독도 답배(答拜)하였다. 상이 또 양원에게 재배하니, 

양원이 답배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대인(大人)의 은덕을 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의 군신이 그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고 있으니 사배(謝拜)하겠소이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사배는 그만두시오."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황은(皇恩)이 하늘 같으니 대인께 사배하겠소이다. 만약 대인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 어찌 오늘이 있겠소이까."

하고,


상이 승지(承旨)를 시켜 제독에게 고하게 하기를, "국왕(國王)께서 배례(拜禮)한 뒤에 삼고두(三叩頭)하고자 합니다."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이것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제독 앞으로 나아가서 재배(再拜)하고 삼 고두(三叩頭) 하니, 제독이 답배(答拜)하였다.


상이 다시 양원 앞으로 나아가서 재배하니, 양원이 답배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황은이 망극하고 대인의 덕도 망극하오이다."


*해설*


제독 :  명나라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온 사령관 이여송.

양원 :  명나라의 장수. 부사령관.


상이 제독에게 재배 (再拜) 하자 제독도 답배하였다. (선조가 이여송에게 두 번 절을 하자 이여송도 두 번 절을 하였다.)

위기에 처한 조선이 아무리 급박한 상황에 놓였을지라도 한나라의 왕이 일개 장군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비굴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두(三叩頭 )란 용어가 낯설어 찾아보니 머리가 닿도록 세 차례에 걸쳐 절을 한다는 의미다. 심지어 양원이라는 부 사령관에게 까지 절을 하는 선조의 모습이 있다.


조선을 이끄는 왕이 이런 모습이었으니 그 누가 선조를 따르겠는가. 심지어 전쟁의 판세를 잘 읽지도 못해 이순신마저 파직시키니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선조는 (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는 56세를 살았고 41년간을 왕위에 있었다. 그는 사림파를 정계에 주축으로 등용시켰다. 그들은 동인, 서인으로 또 동인은 북인과 남인으로 나뉘었다. 결과적으론  망국의 근원인 당쟁의 불씨를 선조가 만들의 준 셈이다.


한양을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을 시도했던 어리석은 왕, 고통받는 백성을 져버리고

열등감과 시기심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오로지 자기 살 궁리만 모색했던 못난 군주.


그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치고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9에 있다.

조선왕조를 열었던 태조 이성계의 왕릉과 근접한 곳이다. 조상님께 죄를 빌며 용서를 구하라고 그곳에 선조의 왕릉을 만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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