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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Jul 22. 2021

네 이놈들.. 세번의 환국, 강력한 왕권강화 숙종

제 19대 왕 숙종

환국 (換局) :  갑자기 정권교체가 되는 정치적 상황을 말한다. 하루아침에 반대 당파의 많은  사람들이 실각하고 목숨을 잃게 된다.


숙종시대는 1392년 조선 개국 이후 당파 싸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치열한 붕당정치의 서인과 남인은 ' 으르렁 ' 거리며 서로를 깎아내렸다.


이때 숙종은 3번의 일방적인 환국을 통해 세력교체를 하고 왕권을 강화한다. 비인 인현왕후와 후궁 장희빈을 이용할 정도였으니 드라마에 비친 것처럼  우유부단한 왕은 아니었다.


그의 성격은 불과 같고 다혈질이었다는데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 씨는 그를 두고 “세자는 내 배로 낳았지만 그 성질이 아침에 다르고 점심에 다르고 저녁에 다르니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기질은 후대의 영조, 사도세자, 정조까지도 영향을 준다.


조선왕조실록 숙종 14년(1688년) 7월 16일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내의원 문안에 비 답하다>


이때에 임금의 노여움이 폭발(爆發)하여 점차로 번뇌가 심해져, 입에는 꾸짖는 말이 끊어지지 않고, 밤이면 또 잠들지 못하였다.


내의원(內醫院)의 문안(問安)에 비답(批答)하기를,"마음이 답답하여 숨쉬기가 곤란하고 밤새도록 번뇌가 심하여 자못 수습(收拾)할 수가 없다." 하니,


제조(提調) 등이 진시(診視)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이것은 바로 마음의 병이니, 맥(脈)에는 병이 나타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구구하게 의약(醫藥)으로 치료하겠는가?" 하였다.


이 내용을 보니 숙종은 오랜 기간 동안 자신이 화병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화를 늘 마음에 두고 살았음에도 조선 왕조에서 영조(81세), 태조(72세), 고종(67세), 광해군(67세), 정종(62세) 다음, 숙종(57세) 그나마 여섯 번째로  장수한 왕에 속한다.


정치란 나라를 다스림을 뜻한다. 백성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기 위함이 그 바탕임에도 당파 싸움에 연연 하는 관료들을 보며 임금은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



숙종은 서인과 남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3번의 환국을 한다. 정권이 바뀌면 곧 목숨과도 연결되는 문제니 신하들은 왕의 심경을 잘 살펴야 했다.


경신환국 : 1680(숙종 06년) 남인 >>서인 기사환국 : 1689(숙종 15년) 서인 >>남인 갑술환국 : 1694(숙종 20년) 남인 >>서인


첫 번째 경신환국의 배경을 살펴보자.


숙종 6년, 남인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1680년 3월 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이었던 허적의 집에 잔치가 열렸다. 그날 비가 내렸는데 허적은 임금이 쓰는 천막(용봉 차일)을 허락도 받지 않고 가져갔다.


*용봉 차일(龍鳳遮日:기름을 칠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만든 천막)*


마침 숙종은 허적에게 천막을 내주려 생각하고 있었지만 허적은 임금이 쓰는 궁중 물품을 함부로 가져갔으니 숙종은 그를 괘씸하게 여겼다.


미운털이 박힌 터에 그다음 달인 4월, 숙종은 허견(허적의 아들)이 역모를 꾸민다는 고변을 받자 허적은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된다. 남인의 대표가 이렇게 쓰러지자 서인들이 집권을 시작한다.


1차 경신환국은 남인에서 서인으로의 정권교체를 말한다.


두 번째 기사환국을 알아보자.


숙종은 왕위에 오른 지 여러 해가 지나도 아들을 얻지 못했다. 마침내 후궁으로 들인 장 씨가 아들(윤)을 낳았는데 숙종은 장 씨를 희빈으로 삼고 윤을 원자로 책봉하려 했다.


이문제를 놓고 당시 집권 세력인 서인들은 아직 왕비 인현왕후 민 씨의 나이가 어리므로 좀 더 기다렸다가 왕위를 잇는 것이 옳다며 원자 책봉을 반대했다.

남인은 숙종을 지지했고 기세 등등한 서인들은 반대했다.


숙종이 원하는 대로 장 씨가 희빈이 되고 그녀의 아들이 원자가 되자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은 상소를 올려 숙종의 잘못을 지적했다.


이미 다 끝난 일을 한나라의 원로가 다시 거론하여 정국을 혼란스럽게 한다는 빌미로 삼아 송시열은 유배를 갔다가 사약을 받게 된다.


결국 숙종은 세력이 많이 커진 서인을 축출하고 남인의 손을 들어줬다.1689년 (숙종 15년)에 일어난 사건이다.2차 기사환국은 서인에서 남인으로의 정권교체를 말한다. 아들을 낳지 못한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된다.



세 번째 갑술환국을 살펴보자.


숙종은 장희빈을 총애하여 왕비까지 삼았으나 권력 욕심과 질투를 하는 그녀를 싫어했다. 그는 인현왕후를 폐한 일을 후회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폐비된 인현왕후를 복위 하려 하자 당시 집권세력인 남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그 이유는 장희빈의 아들 (훗날 20대 임금, 경종)에게 줄을 서고 있던 남인들이 폐비가 복위되면 다시 실각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1694년(숙종 20년) 숙종은 다시 서인을 등용시키게 되고 폐비된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했다.3차 갑술환국은 인에서 인으로의 정권교체를 말한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일화는 드라마의 극적인 소재로 여러 번 나왔다.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는 왕비가 되고 장희빈은 다시 후궁이 됐다.


1701년(숙종 27) 8월 14일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희빈이 신당(神堂)을 만들어 왕비의 죽음을 기도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이를 두고 숙종은 크게 대로했다. 희빈에게 자진하라는 명이 내려진다.


권력을 얻기 위해 모략과 술수가 난무하던 때 숙종은 그들의 힘을 누를 명분이 필요했다. 기사환국 시기에는 서인의 위세가 왕권을 위협했을 정도라고 한다.


서로 다른 집권세력을 환국을 통해 바꿔가며 왕권을 강화했던 결과적으로 숙종은 왕비들을  이용한 셈이다.


왕의 힘이 막강했으므로 신하들은 임금의 눈치를 봐야 했고 그가 추진하는 정책을 따라야만 했다.대동법의 전국적 시행, 상평통보의 활발한  유통 등은 조선 후기의 사회 경제적 발달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숙종 때에 이르러 공정 왕이었던 정종(제2대 왕)은 묘호를 받고 단종, 사육신이 복권된다. 왕권의 정통성에 관심이 많았던 그 또한 적통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앞서 숙종은 성격이 다혈질이었다고 했다.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 하나쯤은 있지 않던가. 감정의 기복이 심해서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이들 말이다. 왕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신하들은 항상 전전긍긍했을 듯하다.


한나라의 리더로서 부족한 기기질이지만 오히려 강한 왕권을 행사하는데 도움이 됐다.  왜란과 호란 이후 조선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숙종의 사회, 경제적인 정책들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는 일마다 서인과 남인 세력이 반대를 했다면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숙종의 치적에 비판적인 시각도 있지만 필자는 그의 손자들이 (영조, 정조) 18세기 조선문화의 중흥을 이끌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숙종의 능은 명릉(明陵)으로 경기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4 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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