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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Aug 12. 2021

정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혹시 담배 때문이 아닐까?

제22대 왕 정조

필자는 25년간 태우던 담배를 끊었고 5년이 지났다. 식후 ' 땡 ' 은 불로장생이라. 애연가들이 말하는 농담이다. 말도 안 되지만 한때 담배를 인생의 동반자라 여긴 사람으로서 이해는 한다.


정조 역시 상당한 애연가라고 소문이 나있다. 그의 죽음에 독살설이 제기되고 당시 정치적 상황과 연결시켜 합리적인 의심을 하고 있으나 혹시, 정조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에는 담배도 일부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오랜 기간 정조의 몸에 축적된 니코틴으로 인해 종기 치료에 쓰는 약들이 제대로 효과를 낼 수 없지 않았는가 말이다.



조선시대 왕들의 평균 수명이 48세라 하니 정조는 평균보다 1년을 더 살았다. 49세의 한참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그를 두고 여러 논란이 있다.


정조는 병석에 누운 지 14일 이후 급속한 건강악화로 유명을 달리했다. 우선 1800년(정조 24년) 6월, 정조의 생애 마지막 14일을 살펴보자.


6월 14일.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편전으로 불러 진찰을 받다. >


상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종기가 나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므로 내의원 제조 서용보(徐龍輔)를 편전으로 불러 접견하였다.


용보가 안부를 묻자, 상이 이르기를,


"밤이 되면 잠을 전혀 깊이 자지 못하는데 일전에 약을 붙인 자리가 지금 이미 고름이 졌다."하였다.  


(중략)


"등 쪽에 또 종기 비슷한 것이 났는데 지금 거의 수십 일이 되었다. 그리고 옷이 닿는 곳이므로 삼독[麻毒]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어 윤교 등에게 진찰해 보도록 명하고 분부하기를,


"무슨 약을 붙이는 것이 좋겠으며 위치는 그리 위험한 곳이 아닌가?" 하니, 윤교가 아뢰기를


"위치는 위험한 데가 아니고 독도 없습니다만, 근이 들어 있으니 고름이 생길 것 같습니다." 하고, 성일은 아뢰기를,


"웅담고(熊膽膏)를 붙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웅담고도 효과가 없을 것 같다."


 >>> 현대의학에서 종기는 간단한 외과적 처치로 치료하면 금방 낫지만 그때는 생명에 지장을 줄 정도로 위험한 병이었다.


정조는 종기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해 어의를 불렀나 보다. 대화를 보니 약을 붙였는데 잘 낫지 않는다는 정조의 심란한 마음을 알 수 있다.


6월 15일 ~23일


가감 소요산, 사순 청량음, 우 황고, 유분 탁리산, 패모고, 우렁이 고약, 용뇌 안신환, 우황청심원 등을  치료제로 쓴 기록.


>>> 여러 약들을 써보았으나 정조는 통증이 줄어들지 않고 효과가 없었다.


6월 24일


<조제한 약들을 시험해 보고자 들여보낼 것을 명하다.>


심인(沈鏔)이 조제한 연훈방(烟熏方)과 성전고(聖傳膏)를 들여보낼 것을 명하였다.


그 처방은 (중략) 신하들이 섣불리 시험하면 안 된다고 말하였으나 이때에 와서는 모든 약이 효과가 없어


상이 연훈 법을 한번 시험해 보고 싶어 하므로 마침내 가져다가 써보기에 이른 것이다.


>>> 연훈방 (烟熏方) 치료를 신중해야 한다고 신하들이 정조에게 고한 이유가 있다. 연훈 법은 여러 약재들을 섞은 종이를 말아 이를 태워서 나오는 연기를 환부에 대는 방법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심각한 수은중독의 부작용이 있었다고 한다.


종기로 인한 고통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데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호전되지 않으니 정조는 위험을 무릅쓰고 이 방법을 써본 듯하다.



6월 26일


<경옥고를 들여보내다.>


>>> 경옥고는 인삼성분이 들어 있는 약재다. 인삼은 정조의 등창을 더욱 악화시켰다. 어의 심인은 정조가 승하하는 날까지 계속 처방했다.


6월 27일


<약원 제신들과 연훈방을 다시 쓰는 문제를 논의하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였다. 이시수가 아뢰기를,


"탕약 두 첩을 드신 뒤에 별다른 증세는 없으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특별히 다른 증세는 없다."


하고, 시수가 아뢰기를,


"연훈방을 다시 시험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시험해 보아야겠다."


하자, 시수가 아뢰기를,


"연훈방은 종기에 맞는 처방이긴 하나 정신이 혼미하신 이때 연기가 혹시 방안에 퍼지면 정신에 해로울까 걱정이 됩니다."


하고, 유광익·심연 등은 아뢰기를,


"연훈방은 우선 중지하고 천천히 상태를 보아가며 시험하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하였다.


6월 28일


...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갈을 입안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또 인삼차와 청심원을 계속 올려드렸으나 상은 마시지 못했다.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 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 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유시에 임금이 창경궁의 영춘헌에서 승하하다.>


6월 14일 ~ 28일 동안 실록은 정조의 병이 약을 써도 잘 듣지 않고 결국 사망까지 이르게 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당시 처해졌던 의료 처방과 정치적 상황을 근거로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  의료 처방 -


연훈방과 경옥고 (인삼성분), 인삼차가 정조의 병을 더욱 악화시켰다.


종기가 심해져가는 도중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도 고통이 줄어들지 않자 정조는 수은 중독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연훈방을 시험하도록 허락한다.


6월 24일, 27일의 기록으로 보아 연훈방의 처방은 정조의 동의하에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경옥고와 인삼차는 정조의 등창을 더욱 악화시켰다. 이 부분이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정조는 문. 무를 겸비한 임금이었다. 의학에도 식견이 넓었던 그는 자신이 직접 처방을 내려 약을 먹기도 했다. 그런 정조가 내의원에게 자신의 체질은 인삼이 맞지 않으니 약재로 인삼을 쓰지 말라고 했다 한다.


그러나 내약원은 정조가 승하하기 전까지 인삼성분의 약재를 사용한다.



- 정치적 상황 -


정조가 탕평책을 썼다고 하지만 실제는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는 분위기였다. 좌의정의 심환지는 노론의 영수였고 내약원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실제로 노론의 음모에 의해 정조는 암살 위기를 가까스로 넘기기도 했다. 그를 계기로 만들어진 것이 장용영이라는 왕의 친위부대다.


정조가 죽은 이후 심환지에 의해 조선왕조의 폐막 알리는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정조의 사망 원인에 담배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근거는 없다. 다만 유해 무익한 담배를 오랫동안 즐겼다면 분명 건강을 해쳤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다음은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6권에 나오는 담배 예찬론이다.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보았지만 오직 이 남령초에서만 힘을 얻게 되었다.


화기(火氣)로 한담(寒痰) 8)을 공격하니 가슴에 막혔던 것이 자연히 없어졌고 연기의 진액이 폐장을 윤택하게 하여 밤잠을 안온하게 잘 수 있었다.


정치의 득과 실을 깊이 생각할 때에 뒤엉켜서 요란한 마음을 맑은 거울로 비추어 요령을 잡게 하는 것도 그 힘이며


갑이냐 을이냐를 교정하여 추고(推敲) 할 때에 생각을 짜내느라 고심하는 번뇌를 공평하게 저울질하게 하는 것도 그 힘이다.”


그는 담배 흡연 장려책을 제시했지만 한편으로 농민들이 농지에 곡식을 심지 않고 담배를 재배해 문제가 있다는 상소를 받기도 했다.


현대의 담배와 200여 년 전의 담배는 차이가 많이 있었을 거다. 필터만 해도 그렇다. 오늘날 담배는 고급화되어 필터라도 있다 치지만 조선시대의 담배는 곰방대에 연초를 넣고 연기를 흡입했으니 얼마나 독했을까..



인조실록 16년 8월 4일, 담배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담배는 일본에서 생산되는 풀인데 그 잎이 큰 것은 7, 8촌(寸)쯤 된다. 가늘게 썰어 대나무 통에 담거나 혹은 은(銀)이나 주석으로 통을 만들어 담아서 불을 붙여 빨아들이는데, 맛은 쓰고 맵다.


가래를 치료하고 소화를 시킨다고 하는데, 오래 피우면 가끔 간(肝)의 기운을 손상시켜 눈을 어둡게 한다.


 이 풀은 병진 ·정사 연간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와 피우는 자가 있었으나 많지 않았는데,임술년 이래로는 피우지 않는 사람이 없어


손님을 대하면 번번이 차[茶]와 술을 담배로 대신하기 때문에 혹은 연다(煙茶)라고 하고 혹은 연주(煙酒)라고도 하였고, 심지어는 종자를 받아서 서로 교역(交易)까지 하였다.


오래 피운 자가 유해 무익한 것을 알고 끊으려고 하여도 끝내 끊지 못하니, 세상에서 요망한 풀이라고 일컬었다.


선양으로 굴러 들어가자 선양 사람들도 또한 매우 좋아하였는데, 오랑캐 한(汗)은 토산물(土産物)이 아니라서 재물을 소모시킨다고 하여 명령을 내려 엄금했다고 한다.


16세기 후반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온 담배는 조선 사회를 흔들었다.


하멜 표류기에는 조선은 4, 5세의 어린아이들도 담배를 피우기 시작해서 남. 간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쓴 내용이 있다.


1885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선교사는 우리나라의 아이들이 곰방대를 물고 있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고도 한다.



지금 형태의 담배가 만들어진 건 1945년 9월이다. 그 담배의 이름은 ' 승리 ' 였다. 8월 15일 광복의 기쁨을 담배 이름 속에 반영했나 보다.


최근에 만원 짜리 담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입이 쩍 벌어진 적이 있다. 에쎄 로열 팰리스라는 담배다.


정조가 즐겼다는 서초10 %, 궁중 음악을 들려주며 재배한 담뱃잎 10%가 들어간 고급 담배라고 제품설명서에 써져 있다.


도 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왕위에 올라 노론 세력의 끊임없는 견제를 받았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담배 연기에 담아 하늘로 ' 훅 ' 날려버렸으리라. 담배를 피워 본 사람들은 안다.


담배 한 모금에 인생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털어버릴 수 있음을...


니코틴 중독 때문에 쉽게 끊지 못하고 건강에 좋지 않음을 알면서도 금연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고단한 인생의 여정에서 담배를 사랑하며 시름을 달랬던 정조의 마음을 생각해본다.


정조의 능은 경기 화성시 안녕동 187-45에 있다.


*  이글의 참고 자료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전 21화 고추장 마니아인 영조, 탕평책,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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