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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세규 Aug 20. 2021

순조 시대, 천주교의 전파, 세도정치, 홍경래의 난

제23대 왕 순조

정조가 승하하자 어린 왕 순조 (11세)가 왕위를 이어받는다.


정순왕후(증조할머니, 영조의 계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시작부터 왕권이 없었던 순조의 재위 시절,  굵직굵직한 몇 가지 사건들을 다뤄본다.


신유박해, 세도정치, 홍경래의 난이다. 용어가 낯설지 않음은 교과서에서 많이 봤던 터라 눈에 익은 익숙함 때문인가. 이번 기회에 확실히 개념 정리를 하고 가자.


 -  신유박해 -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특이한 점이 있다. 선교사에 의해 전도받지 않고 ' 자생적으로 ' 생겨났다.


1783년 (정조 7년) 청나라에 도착한 27세의 젊은 이가 있었다. 서양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청년은 천주교를 자연스럽게 만났다. 그는 이듬해인 1784년 2월, 우리나라 최초로 세례를 받는다. 이 젊은이가 이승훈이다.


당시 벤타 본이라는 서양 선교사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대개 천주교는 누군가에 의해 전도되었는데 그가 스스로 찾아와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이승훈은 천주교 교리와 수학, 기하학 등을 조선으로 가지고 온 후 선교를 했다. 초기의 천주교는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이다. 이때 전해진 서양의 기하학을 응용해서 만든 것이 수원성 축조에 큰 도움이 되었던 기중기다.


천주교의 바탕은 ' 평등 '이다. 엄격한 신분체제였던 조선사회에서 기득권층이 곱게 봐줄 리 없었다.  당시 천주교는 서학이라 불렸다.


서학에는 종교적인 사상과 함께 서양의 과학기술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주교는 지배체제의 근간을 흔들었지만 함께 들어온 천문, 물리, 수학 등의 과학지식깨어있는 지식인들에게 놀라운 학문이었다. 정조도 서양 학문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초기의 천주교는 일부 실학자들에 의해 전파되었고 날이 갈수록 백성들에게도 퍼져나갔다. 모든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천주교가 신분체제에 억눌리며 살았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1799년에는 천주교인이 1만 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결국 조선의 지배층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정조 사후  권력을 잡은 노론 정권은 1801년 대대적으로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 사건이 신유박해다. (순조 1년)


이승훈 등 천주교도 100여 명이 처형되었고 정약용 등 진보적인 사상가 약 400명이 유배됐다. 신유박해의 배경은 신분과 유교 질서를 위협하는 천주교도 있었지만 노론이  남인 세력(실학자)을 몰아내기 위한 명분이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김범우의 집터에 자리잡은 명동성당


- 세도정치 -


세도정치의 사전적인 뜻은 '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 '다.


여기서 말하는 특정인의 대표적인 가문은 안동 김 씨를 말한다. 실력보다 돈이 많고 집안이 좋으면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거다. 


가장 쉬운 말로 표현하면 ' 끼리끼리 다 해 먹었다. ' 무려 60년간이나 지속된 세도정치는 조선을 파국으로 몰아갔다.


왕권은 유명무실하고 안동 김 씨에게 권력이 편중되니 관료체제가 무너졌다. 지방의 유림들마저 백성들을 못살게 굴었다.


순조의 아내는 안동 김 씨의 수장인 김조순의 딸이었다. 그러나 정작 김조순은 관직을 마다 하는 등 위세를 떨치지 않았으나 그 주위 인물들이 본격적인 세도정치의 시기를 이끌었다.


- 홍경래의 난 -


조선의 재정은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이뤄졌다. 자신의 배만 불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세도가들이 수취 체제마저 변질되게 만들었다. 부정부패가 만연 했으니 어떻게든 백성들을 착취해 세금을 뜯어내는 수령과 토호들이 나라를 어지럽혔다.


이른바 ' 삼정의 문란 '이다.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이 세 가지는 세금을 걷기 위한 제도다. 하나하나씩 살펴보자.

전정은 땅을 정확하게 조사, 측량하고 거기서 나오는 농산물의 양을 검사해서 공평하게 세금을 내게 하는 방식이었다.


변질 >> 20년마다 전지 조사를 하는 규정이 있었으나 지방의 수령과 토호들이 중간에서 농간을 부렸다.


백지징세(白地徵稅) : 없는 땅에 세금을 매김. 도결(都結)과 방결(防結) : 실제보다 많이 부풀려 세금을 부과함.


군정은 군대에 간 사람의 생활을 가지 않은 사람 두 명이 무명이나 베를 내어 도와주도록 하는 제도였다.


변질 >> 군포를 내면 군역을 면제받는 관례가 생겼다. 이후 점점 군포를 내지도 않고 군대도 가지 않는 편법을 동원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군대를 운영하려면 세금이 필요한데 군포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으니 지방 관아에서는 불법징수를 했다.


인징(隣徵) : 이웃에게 강제로 징수.

족징(族徵) : 가족에게 강제로 징수.

황구첨정(黃口簽丁) : 어린아이에게 징수.

백골징포(白骨徵布) : 죽은 자의 이름으로 징수.


환정은 어려운 시기에 국가에서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를 한 다음 돌려받는 정책이었다.


변질 >> 빌려 갔으나 갚지를 못하는 농민들이 늘어났다. 소량의 이자를 받다가 빌려간 곡식의 절반을 받기도 하고 강제로 환곡을 하게 끔 했다. 심지어 곡식에 모래를 섞어서 빌려주는 양을 늘렸다. 아전들은 이자를 곡식이 아닌 돈으로 받기도 했다.


전정, 군정, 환정의 변질이 백성들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다.


1804 정약용이 강진 유배 때 지은 시는 그때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하일 대주 (夏日對酒 ) / 여유당전서 시문집 (시) 5권


많고 많은 머리 검은 자들 똑같은 이 나라 백성이요, 진실로 징수하여야 한다면 부자들을 대상으로 함이 옳건마는,


어찌하여 가죽 벗기고 살 베는 정치를 품 팔고 구걸하는 무리에게만 시행하나.


군보란 것이 대체 무슨 명목인가. 정말 나쁘게 되어 먹은 법이로다. 일 년 내내 힘들여 고생해도 제 몸 하나 가릴 수 없구나.


태에서 갓 태어난 어린아이도 재와 먼지로 돌아간 백골도, 그 몸에 요역이 부과되어


곳곳에서 가을 하늘 향해 울부짖고, 양근(陽根)을 자를 만큼 원통하고 가혹하니 이 일이 정말로 애처롭고 쓰라리다.


【양근을 자른다 [絶陽]는 말은 남자의 생식기를 잘라 버린다는 것이다.】



1811년 (순조 11년)에 봉기한 홍경래의 난의 원인은 이와 같은 사회적 병폐를 견디다 못해 일어났다.


홍경래의 난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각은 지역차별에 대한 문제다. 평안도 서북 출신을 천한 신분으로 여기는 풍조여서 그는 과거를 통해 관직을 가질 수 없었다. 순조 집권 초반은 본격적인 세도정치의 시작은 아니었지만 특정세력이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때이긴 했다.


홍경래의 난속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여러분은 김삿갓을 아시는가..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말이다. 주로 권력의 현실을 풍자하는 시를 남겼다


그의 이름은 김병연이다. 삿갓을 쓰고 다닌 이유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고 부끄러운 죄인이라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난이 일어났을 때 할아버지인 김익순은 홍경래에게 항복을 했다. 그는 이 죄를 모면하고자 반란군 장수의 목(김창시)을 돈 1000냥으로 사려 했다. 이 일이 밝혀지자 임금을 속인 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당시 6살이었던 김병연은 하인의 도움을 받아 숨어 지내며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훗날 그의 집안이 사면되어 과거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김익순 사건을 주제로 과거에 합격했다.


그러나, 아뿔싸! 김익순이 자신의 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늦게 알고 난 김병연은 벼슬을 내려놓고 삿갓을 쓰며 방랑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비판한 글로 급제한 과거시험이 할아버지가 했던 일임을 알았으니 그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순조는 11세의 나이에 임금이 되었다. 수렴청정을 거쳐 성인이 된 후 외척을 제거하고 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는 등 나름 왕권 강화를 하려 했으나 1790 ~ 1834 (44세) 재위 기간 1800년 ~ 1834년 (34년)을 끝으로 짧은 생애를 마친다.


19세기 초반, 조선은 왕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영, 정조를 거치면서 다소 안정된 모습을 찾아가는 듯했던 정국은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수렴 정청 했던 정순왕후는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다. 정조가 이뤄놓은 개혁 정책을 바꾼다.


왕권을 강화하려 만든 장용영 (왕의 친위부대)를 해산시키고 싱크탱크였던 규장각을 축소시킨다. 어린 왕이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노론에 의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이었다.


역사에서 ~라면 이란 가정법은 안타까움을 더욱 크게 만든다. 아버지 정조가 좀 더 건강을 챙겨서 딱 10년만 아들 순조를 돌봐줬더라면 급변하는 19세기의 세계사 속에서 조선이 잘 대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의 능은 인릉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에 있다. 태종의 능인 헌릉과 같은 곳에 있어서 헌인릉이라 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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