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천비단 Mar 18. 2024

놀이터와 야동

우리는 웃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야~동!”


 팔뚝을 햇볕에 달군 아이가 우렁차게 소리쳤다. ‘야동’이란 말이 아파트 단지 전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아직까지도 알지 못한다.




 아이들은 심심하면 일단 아파트 놀이터에 모였다. 그 나이도 다양했다. 유치원에 다니는 애기들부터, 자전거를 손 놓고 타는 중학생 형도 있었다. 학교 끝나는 시간이 되면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는데 놀이터에 삼삼오오 모였다.


 아이들의 창의력은 심심할 때 최대로 발휘된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아이들은 놀이터, 흙, 배드민턴장, 정자, 축구공만을 가지고 다양한 놀이를 만들었다.



1. 흙놀이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흙을 가지고 다양한 건축물을 만든다. 보통은 두꺼비집을 만들었다. 바닥에 한 손을 깔고, 그 위에 다른 손으로 흙을 덮었다. 둥그렇게 무덤처럼 만들고, 흙 아래에 깔린 손을 조심스럽게 빼면 두꺼비집이 완성되었다. 그것을 왜 두꺼비집이라고 불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살면서 두꺼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2. 지옥탈출


바닥을 밟으면 안 된다


 정확한 명칭은 기억 안 나는데 컨셉은 이러하다. 흙바닥은 용암이다. 우리는 술래를 피해 놀이터 구조물 위에서 도망쳐야 한다. 술래는 용암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 만약 도저히 술래를 피할 수 없다면, 흙 위를 깽깽이로 도망쳐야 한다. 술래에게 잡히면 잡힌 사람도 술래가 된다. 이렇게 최후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아무리 보아도 탈출 요소가 보이지 않는데 왜 지옥탈출이라고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이 게임에는 특수한 룰이 있었다. 바로 깍두기다. 좀 어벙하거나 몸이 약한 친구는 깍두기로 넣었다. 깍두기는 무적이었다. 술래에게 잡혀도 아무 일 없이 다시 도망간다. 대체 저게 무슨 재미일까 싶었지만, 당사자가 해맑게 뛰어댕기니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넘어갔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모자란 친구도 놀이에 껴주기 위한 어린이들의 배려였다. 지금은 탑티모로 10 데스 하면 쌍욕이 날아오는데. 왜 롤에는 깍두기가 없을까.



3. 딱따구리


신발 신고 올라가면 큰일 나는 곳


 플레이어들은 모두 정자 위로 올라간다. 이때 가급적 신발은 벗는 게 좋다. 신발을 신고 정자에 올라갔다가 경비 아저씨한테 들키면 호되게 혼난다. 술래는 정자 중앙에 서고, 나머지는 각 가장자리 기둥에 붙는다. 이제 눈치싸움이 시작된다. 술래는 사람들을 감시한다. 술래가 아닌 사람은 기둥에 손을 대고 있다가, “딱따구리”라고 외치며 다른 기둥으로 뛰어간다. 이때 술래에게 잡히면 잡힌 사람이 술래가 된다.


 직접 해보면 알겠지만 술래 왕따 게임이다. 몸짓이 느린 친구가 술래가 되면 1시간이 넘어도 술래가 바뀌지 않는다. “딱따”까지만 외치고 뛰는 척하면 술래가 깜짝 놀라 달려온다. 그 사이에 반대편에 있던 친구가 “딱따구리”를 외치고 뛴다. 그럼 술래가 허망한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본다. 이 짓이 계속 반복된다. 솔직히 술래가 불쌍했다. 그리고 술래가 불쌍해야 농락하는 재미가 있다.



4. 깡통차기


일본 놀이라는 설도 있고 미국 놀이라는 설도 있다


 깡통차기는 술래는 깡통을 지키고, 나머지는 깡통을 걷어차는 게임이다. 진짜 깡통으로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보통은 축구공 가지고 했다.


 배드민턴장 앞, 정자 옆에 넓은 광장 같은 공간이 있다. 그곳에 축고공을 놓는다. 술래는 축구공을 한 발로 잡고 10초를 센다. 나머지 아이들은 아파트 이곳저곳으로 숨는다. 숫자를 다 센 술래는 감시자가 되어 축구공 주변에서 어슬렁거린다. 술래가 아닌 사람은 기회를 노리다가 축구공으로 냅다 달려 걷어찬다.


 축구공을 차기 전에 술래에게 잡히면, 축구공 근처에 수감된다. 만약 다른 사람이 축구공을 차는 데 성공하면 수감된 사람들이 도망간다. 술래가 모든 사람을 잡으면 술래의 승리, 그렇지 않으면 패배다.


 특이한 룰이 하나 있었다. 술래가 사람을 발견하면 그 사람을 잡는 대신, 그 사람보다 먼저 축구공에 달려가 공을 발로 짚으면 그 사람을 잡은 것으로 취급한다. 이때 술래는 그 사람의 이름과 함께 “야~동”이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내가 아는 그 야동???


 아무리 내가 초등학생이었다 해도, ‘야동’이 뭔지는 알았다. 야한 동영상의 줄임말 아닌가. 처음에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런데 물구나무를 서서 들어도 ‘야동’이 분명했다. 대체 ‘야동’이라고 외치는 이유가 뭘까? 어른은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한 뜻이 있는 것일까? 이 놀이를 내게 알려준 형들도 ‘야동’이라고 외치는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 걸 보면 별 뜻 없는 것 같긴 하다. 그냥 선대의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야동”이라고 외쳤는데 그게 웃겨서 그대로 정착한 게 아닐까.


 혹시 ‘야동’이라고 외치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알려주길 바란다. 다른 동네에도 야동룰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일단 인터넷에 검색했을 때는 아무것도 안 나왔다.




 나는 그날의 놀이터를 기억한다. 매미가 우는 여름날 정자 위를 뛰어다니던 그날을, 형들과 지하주차장에 갔다가 경비 아저씨한테 걸려서 혼나던 그날을, 그네에 여자애와 함께 올라타서 바람을 가르던 그날을, 친구 아주머니가 베란다를 열어 놀이터에서 노는 우리에게 밥 먹으라고 외치던 그날을.


 어느 순간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 아이들이 실종되었다. 배드민턴을 치는 아이도, 축구공을 차는 아이도, 그네를 타는 아이도 모두 사라졌다. 모두 훌쩍 커서 놀이터를 떠나버렸다. 더이상 아파트에 아이들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이들이 없는 아파트는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우리는 웃음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구독, 라이킷, 댓글, 응원은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이전글

https://brunch.co.kr/@bidancheon/61


다음글

https://brunch.co.kr/@bidancheon/63


이전 08화 컴퓨터실과 스타크래프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