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이 타닥타닥 타올랐다. 재가 된 불쏘시개 옆에 꼬챙이에 꽂힌 무언가가 익어 가고 있었다. 엄마는 그것을 꼬챙이에서 빼내고 후후 불어 내 손에 쥐어주었다.
나는 일생일대의 고민에 빠졌다.
외할머니는 양평에 살았다. 부모님은 명절과 김장철만 되면 ‘시골’에 가자고 했다. 나는 ‘시골’이 외할머니가 사는 집 또는 동네를 뜻하는 줄로 이해했다. 뭐, 어린애가 시골 갈 일이 외할머니댁 말고 없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
이렇게까지 산골은 아니었다.
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리면 시골 마을이 나타났다. 도로가 검은색에서 흰색, 회색으로 변하더니, 점점 차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아졌다. 개천을 따라 쭉 달리다가 왼쪽으로 빠지면 산길이 나타난다.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며 오프로드 체험을 하다가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저 멀리 주황색 지붕이 보였다. 논밭에 개가 컹컹 울고, 고양이가 도망치기 바쁘다. 오르막길에 주차하고 내리면 시골 공기가 나를 반긴다. 어른들은 시골이 도시보다 공기가 맑다며 좋아했다. 나는 별반 차이를 못 느끼겠는데.
외할머니댁은 외할머니 혼자서 살기엔 너무나도 컸다. 친척이 몇 집이 모여도 공간이 남아돌 정도였다. 망막한 거실에 3인용 소파가 놓여 있고, 그 옆에 선이 둘둘 꼬인 전화기와 온갖 CD 케이스, 종이가 꽂힌 책장이 있다. 그 옆 부엌 식탁 위에는 약과와 땅콩 카라멜이, 그 아래에는 밥솥이 덩그러니 앉아 있다. 화장실 욕조에는 다라이가 한가득 쌓여 있어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고, 변기에 앉으면 진청록색 대용량 통돌이 세탁기와 눈이 마주친다.
자주 출몰하던 길고양이
방 3개가 거실과 이어져 있다. 각각 외양간방, 중간방, 티비방이라고 불렀다. 외양간방은 바깥 외양간과 이어져 있어 창문을 내다보면 눈이 주먹만 한 황소가 보였다. 그 방에 어째선지 노래방 기계가 있었는데 한 번밖에 쓴 적 없다. 중간방은 가장 쬐그만한 방이었다. 가끔 창문으로 보이는 밭에 고양이가 쏘다녔다. 티비방은 커다란 티비와 팔걸이가 뜯겨 나간 1인용 소파와 4인용 소파가 있었다. 티비에서 우리 집에서는 안 나오는 애니맥스 채널이 나왔다.
외할머니댁은 친척들의 만남의 광장이었다. 그 장소 말고 친척들이 따로 모인 적이 없다. 명절이 오면 다 같이 모여 전을 부치고 만두를 빚었고, 김장철이 오면 다라이 대여섯 개 두고 김장을 했다. 어린애들은 어른들 옆에서 김치를 둘둘 싼 수육을 받아먹거나, 개울가에 가서 미꾸라지를 잡았다.
솔직히 외할머니댁은 지루했다. 별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가봤자 티비만 보다가, 핸드폰만 하다가 돌아올 게 뻔했다. 친척 어른들이 용돈을 주는 건 좋았지만, 그마저도 없었으면 울고불고 땡깡부리며 안 가겠다고 난리였을 것이다. 그나마 개울가가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집문을 열고 나가면 코스모스 위로 꿀벌이 윙윙대며 날아다니고, 왼쪽 공터에 나가면 드럼통에 구멍을 뚫어 만든 화덕이 있다. 찻길로 나와 맞은편으로 내려가면 개울이 흐른다. 조심조심 돌계단을 내려가 외할머니가 빨래판으로 쓰던 넓적한 돌을 밟고 마음의 준비를 한다. 종아리를 걷고, 슬그머니 한쪽 발을 물에 담근다. 곧장 차가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머리를 강타한다. 어린애들은 개울가에서 물장난을 치고 미꾸라지를 잡으며 놀았다. 포인트를 조금만 벗어나도 수심이 꽤 깊었기에 우리는 입구 바로 앞만 돌아다녔다.
한 번은 삼촌과 이모부들이 모두 팔을 걷고 나선 적이 있다. 우리는 가지 못했던 깊은 곳까지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더니, 커다란 바위를 들고 “저기! 저기!”외치면서 펑덩펑덩 뛰어다녔다. 이모부가 잽싸게 양팔을 뻗었다. 그리고는 나한테 살짝 주먹을 풀어 안을 보여주었다. 개구리였다.
개굴
개울가에 개구리란 개구리는 죄다 잡은 후, 모닥불을 피워 구워 먹었다. 나는 큰 거부감 없이 개구리를 먹었다. 어릴 때는 참 용감하게 이것저것 잘도 먹는다. 그때는 번데기도 먹었으니 말 다했다.
암개구리의 배를 가르니 하얀 알이 김을 모락모락 뱉었다. 개구리알 맛은 아직도 기억한다. 소금을 살짝 뿌려 먹으니, 해물탕에 들어 있는 어란 맛이 났다. 우리는 개구리를 맛있게 먹어치웠다. 나 어렸을 때는 메뚜기도 튀겨먹었다는 친척 어른의 말과 함께.
봉선화
집 앞에 꽃밭이 있었다. 다양한 꽃이 있었는데 확실히 기억나는 건 코스모스밖에 없다. 언젠가 엄마가 꽃잎을 잔뜩 따서 돌로 찧었다. 짓이겨진 꽃잎을 모으더니, 아이들 보고 손을 내밀라고 했다. 손톱 위에 꽃잎을 올리고 비닐로 칭칭 감았다. 그 상태로 20분 정도 지나 비닐을 푸니 손톱이 매니큐어를 바른 것처럼 색칠되어 있었다. 봉숭아물이었다. 잘못 알아들어서 한동안은 복숭아물이라고 발음했지만.
분홍빛으로 물들인 손톱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내 손이 내 손이 아닌 것 같은 기분. 분명 내 의지대로 쥐락펴락 하는데, 영 내 것이 아니었다. 한번 물들인 봉숭아물은 집에 돌아가서고 며칠 동안 빠지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 여자애들이 내 손을 보더니 예쁘다고 난리였다. 그때 나는 ‘여자애보다 손이 이쁘다’라는 칭찬을 부끄럽게 여겼지만, 봉숭아물 칭찬은 기분 좋았다.
나는 봉숭아물이 지워지지 않도록 정성이었다. 손 씻을 때도 조심조심, 과자 먹을 때도 조심조심. 하지만 아무리 신경을 써도 분홍빛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봉숭아물은 원한 적도, 원치 않은 적도 없는데 멋대로 나를 물들이고 사라졌다. 언젠가부터 우리 집은 명절이 되어도 외할머니댁에 가지 않았고, 더이상 손톱에 봉숭아물들이는 일 따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