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걱정 없이 울고 웃던 그날의 우리
야간자율학습, 줄여서 ‘야자’는 고등학생들이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자습을 하는 것을 뜻한다. 분명 ‘자율’ 학습이라고 하지만, 대부분은 선생님이나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한다. 중학생들에게 야자란 알 수 없는 공포였다. 들리는 소문이라곤 야자를 튀다가 걸리면 뒤지게 맞는다, 폰을 하다가 걸리면 뒤지게 맞는다…. 괴상한 소문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중학생 때 자발적으로 학교에 남아 야자를 했다. 이것은 그 추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3학년 때부터 방과후에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진로 선생님이 마련한 교실에서 8-9시까지 공부했다. 일종의 야자 예행 연습이라고 할까. 왜 방과후 공부를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진로 선생님이랑 친하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공부하던 교실은 일반적인 교실이 아니었다. 반달 모양의 책상을 동그랗게 모아 길쭉하게 늘어뜨린 직사각형 교실이었다. 아마 상담실로 쓰는 방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책상에 둘러앉아 문제집을 펴고 서로 감시하면서 공부하고, 다 같이 놀기도 했다. 스마트폰으로 마피아 게임을 하고, 3x3x3 큐브 빨리 맞추기 대회도 하고, 운동장에 나가 축구를 하기도 했다. 우리가 우스꽝스럽게 웃을 때마다 여자애들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노려봤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나는 집중할 때는 아무 딴짓도 안 하고 공부만 하는 스타일이었다. 공부할 때는 공부하고, 놀 때는 놀고. 정말 모범적인 학생 아닌가. 물론 여자애 지우개나 샤프를 들고 도망친 건 심하긴 했지만 말이다.
학교 정문 앞에 매점이 있었다. 학교 이름을 딴 ‘ㅇㅇ문구’라는 이름이었는데, 학생들은 그곳에서 문구보다는 과자를 더 많이 샀다. 방과후 공부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툭하면 매점에 가서 과자를 잔뜩 사 와서 책상에 펼쳐두고 먹었다.
문제는 그 매점 주인이 굉장히 불친절했다. 주인 아저씨 주인 아줌마 둘 다 서비스 정신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반말을 툭툭 하는 건 물론이요, 유통기한이 지난 껌을 파는 일도 잦았다. 손님을 귀찮아하는 티가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우리는 겨우 16살이었지만, 소비자로서 보호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은 사회 시간에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매점 주인은 우리의 뒷담화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주인 아저씨를 ‘자갈치’라고 불렀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자갈치 봉투에 그려진 문어랑 닮아서 그렇게 부르지 않았나 싶다. 농심에 악감정은 없다.
매점에 갈 때면 “야, 자갈치 가자.”라고 말하며 낄낄댔고, 수학 문제를 틀리면 “아, 시발 자갈치”라며 뜬금없이 쌍욕을 했다. 한 친구가 자기가 사온 껌이 유통기한이 몇 달은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자 기상천외한 자갈치 욕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아저씨는 알까. 자신이 학생들에게 자갈치라 불리며 평생 무병장수할 만한 욕을 들었다는 사실을.
저녁 6-7시쯤 되면 우리는 다 같이 후문으로 갔다. 후문 근처에 한식 뷔페가 있었다. 식당에 가는 길에 남자 선생님들이 비닐하우스에서 담배를 태우는 일이 허다했다. 아무리 사립 중학교라 해도 학교에서 100m도 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는 선생님이라니. 상남자가 틀림없다. 우리는 선생님에게 “샘, 담배 피우면 빨리 죽어요!” 외치고 식당으로 도망쳤다. 유리문 너머로 “시끄러 임마!”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식당에 들어서면 아주머니가 바쁘게 움직이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그 앞 테이블에 온갖 반찬이 쭉 진열되어 있다. 입구 근처에 서 있는 아저씨에게 식권 하나 내밀고, 접시 하나 들고 밥과 고기반찬을 꾹꾹 눌러 담는다. 우리는 미리 오천 원짜리 식권을 열댓 개씩 사놨다. 오천 원이면 그 혜자로운 백반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지면 하나둘 가방을 챙긴다. 후문으로 나와 친구와 함께 길을 걸었다. 대파밭, 주유소, 공장, 사우나, 주민회관, 소방서를 지나친다. 친구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사거리가 나온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친구와 헤어졌다. 이 생활은 약 반년 동안 이어졌다.
어른 되고 보니 더이상 밤늦게까지 친구와 공부하는 일도, 과자를 뜯으며 노는 일도, 고민 상담을 나누는 일도, 한식 뷔페에서 불고기를 먹는 일도 없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나는 두 발로 걷고, 친구는 자전거에 올라타 속도 맞춰 구르던 그 거리를. 그날의 축축하고 쌀쌀맞은 공기를. 우리를 쌩 훑고 지나가던 헤드라이트를. 다리 아래서 무심하게 졸졸 흘러가던 하천을. 우리 발걸음을 듣고 목이 나갈세라 짖어대던 개를. 아무 걱정 없이 울고 웃던 그날의 우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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