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최고점은 과거에 있어서
나는 운동장 구석에 비장하게 자리했다. 프로펠러를 수없이 감았다. 더이상 프로펠러가 돌아가지 않을 정도로 돌렸다.
두 손으로 비행기를 잡고, 하늘을 향해 비행기를 던졌다. 비행기는 부웅 소리를 내며 하늘 높이 치솟아올랐다. 햇빛을 뚫고 멀리멀리……
어느 날 방과후에 고무비행기 만들기 체험이 열렸다. 과학 선생님이 주기적으로 개최하는 행사인 모양이었다. 나는 호기롭게 참가했다. 나는 무려 과학의 날 물로켓 대회에서 2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물로켓이 공중분해되어 꼴찌로 탈락한 경력이 있었다. 손재주라면 자신있다.
과학실에 아이들이 모였다. 과학실은 10명은 앉을 만한 길쭉한 테이블 3개와 선생님이 앉는 테이블 하나가 ㅁ 자로 배치되어 있었다. 뒤쪽 벽에는 전선이나 알코올 램프 따위가 들어 있는 벽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자리에 앉자 선생님이 프라모델 상자 같은 것을 하나씩 나눠주었다. 뚜껑을 여니 설계도 같은 종이 여러 장과 나무 막대기 여러 개, 빨간 플라스틱 프로펠러, 검은색 고무끈이 나왔다.
긴 사투가 이어졌다. 가위로 종이를 자르고, 풀과 테이프로 붙이고, 막대에 플라스틱을 끼웠다. 마침내 고무줄을 팽팽하게 당겨 프로펠러에 연결하면 완성이었다. 시계를 보니 1시간 30분이 흐른 뒤였다.
우리는 비행기를 한 손에 들고 운동장에 나갔다. 적당히 해가 누워 있었다. 나는 운동장 끝에 서서 프로펠러를 돌리기 시작했다. 최소 100 바퀴는 돌려야 한다는 말에, 200 바퀴를 감았다. 오른손에 비행기를 들고, 왼손으로 프로펠러가 못 돌아가게 잡은 채, 온몸을 휘둘러 비행기를 던졌다.
비행기는 지수함수 곡선을 그리며 하늘로 치솟더니 롤러코스터가 추락하듯 흙바닥에 고꾸라졌다.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지만 비행기는 수습 불가였다. 박살이 나버렸다. 나도 내 손재주가 놀랍다.
비행기였던 것을 들고 과학실로 돌아왔다. 선생님은 알코올 램프 여러 개에 불을 붙여 비커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테이블에는 신라면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아, 이게 말로만 듣던 비커 라면인가.
선생님은 스프를 탁탁 털며 뜯고 비커에 때려넣었다. 비커 물이 팔팔 끓자 우리는 라면을 부셔서 비커에 넣었다. 선생님은 책상을 순회하며 나무 젓가락으로 면을 휘저었다. 마침내 라면이 완성되었다. 우리는 비커 하나씩 들고 후후 불며 라면을 먹었다. 고무비행기는 이미 뒷전이었다. 그냥 학교에 제출할 사진 몇 장 찍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리고 내 비행기는 산산조각 났는데 뭐.
비커 라면은 맛이 일품이었다. 어디서 보지도 못한 비커 라면. 소설에서 웬 괴짜 과학자가 삼각 플라스크에 게토레이를 따라 마시던데. 마치 내가 소설 속 괴짜 과학자가 된 기분이었다.
라면을 먹어치우고, 책상 위 쓰레기를 치우고, 싱크대에서 비커를 설거지했다. 그날은 일찍 집에 갔다. 숭고히 희생한 고무비행기는 과학실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왔다.
그날의 고무비행기를 떠올린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다가, 힘없이 바닥에 추락하던 녀석이 지금 내 모습과 닮아 있었다. 꿈을 향해 날아올랐지만 실패한 내가, 꼭 그 고무비행기랑 똑닮았다.
우리가 과거를 추억하는 이유도 이 때문 아닐까. 우리의 최고점은 과거에 있어서, 어른 된 우리는 x축 아래에 처박힌 채 하늘을 동경하던 그때를 자꾸만 뒤돌아보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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