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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Mar 21. 2024

도서부와 셜록 홈즈

아늑하고 포근했던 도서실


 “불가능한 것을 모두 제외하고 나면, 아무리 믿기 힘들어도 남은 것이 진실일세, 왓슨.”


 홈즈가 안락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파이프에서 연기를 내뿜었다. 왓슨은 홈즈의 추리에 경외심을 느꼈다.


 아이는 책 속에 들어갈 것처럼 종이에 얼굴을 맞대었다. 종이 울릴 때까지 아이는 자세 하나 바꾸지 않고 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로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도 아이는 현실로 돌아오지 못한 채 온몸이 두둥실 떠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동네 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옆에 바로 붙어 있던 중학교였다. 동네에 중학교가 하나뿐이었던지라, 그 초등학교 졸업생의 90%는 그 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래서 친구들이 그대로였다. 장소와 복장과 선생님만 달라졌을 뿐, 그다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교실에 갇혀 지루한 수업을 듣고, 문제를 풀고, 점심시간이 되면 급식실에 뛰어가 줄을 서고, 식판에 밥을 받아먹고, 시간이 되면 집에 돌아갔다. 사실상 초등학교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수업 시간이 늘어 더 지루하기만 했다.


 어느 날이었다. 나는 도서실 문 앞에서 문을 열까 말까 고민했다. 그 이유는 도서부 면접 때문이었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도서부 같은 귀찮은 일 따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도서부가 뭐 하는 곳인지도 몰랐고, 독서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초등학교 도서실은 어두컴컴해서 한번도 간 적 없다


 근데 나는 어째서 도서부 면접을 보러 갔냐. 누나 때문이었다. 도서부원이었던 누나가 막무가내로 나보고 도서부에 들어오라고 했다. 봉사 시간을 들먹이며, 자기가 3학년이니 나를 도서부에 꽂아주겠다고, 면접만 보러 오라고 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부정청탁이 판치는 학교라니, 이 학교의 조직문화가 안녕한지 심히 걱정되었다.


 긴 고민 끝에 숨을 들이마시고 도서실 문을 열었다. 긴 책상을 따라 선배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그 앞에 서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떠들었다. 어떤 질문을 받았는지,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솔직히 떨어지든 말든 상관없었다. 누나의 파워 덕분인지 나는 손쉽게 합격했다.




 도서실은 전체적으로 초록색이 난무하는 인테리어였다. 입구에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에 데스크가 있고, 그 앞에 동그란 책상 여러 개가 놓여 있다. 그 뒤로 책장이 열 맞춰 서 있다. 창문으로 햇빛이 나근하게 들어오고, 에어컨에서 시원한 공기가 쏠쏠 나왔다.


 도서부 활동 첫날, 모든 1학년이 집합하여 교육을 받았다. 1학년의 임무는 간단했다. 책을 제자리에 꽂는 것. 점심시간에 대충 시간을 때우다가 카트에 책이 쌓였다 하면 바로 그 책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게 다였다. 그 일을 위해 A4 용지 여러 장을 읽으며 공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는데.


 카트에 쌓인 책을 십진분류법에 따라 책장에 꽂아 넣었다. 50분 남짓 되는 점심시간 동안 내가 할 일은 그것뿐이었다. 심심했다. 주위를 둘러보면 학생들이 죄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도저히 친구와 떠들거나 놀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자리만 차지하기엔 눈치가 보여 나도 책을 읽기 시작했다.


번역이 살짝 아쉽긴 했다


 800번대 책장에 갔다. 황금가지 출판사의 셜록 홈즈 시리즈가 꽂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알라딘 중고매장에서 주홍색 연구를 샀었는데. 나는 별생각 없이 네 사람의 서명을 꺼냈다.


 셜록 홈즈를 시작으로 우아한 거짓말, 초콜릿 레볼루션, 리버보이, 밀실살인게임, 괴도 뤼팽, 모모, 가짜 팔로 하는 포옹 등을 읽었다. 소설이 질리자 비문학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심리학, 과학, 수학, 사회학, 철학 등등등…. 눈을 떠보니 나는 반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늘 책상 서랍에서 책을 꺼내고, 당번이 아닌 날에도 점심시간만 되면 도서실에 갔다. 시나브로 책을 읽는 게 일상이 되었다.




 2학년이 되자 데스크를 맡기 시작했다. 데스크의 역할은 책 바코드를 찍고, 학생증 정보를 컴퓨터에 입력해 대출과 반납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급식을 가장 빨리 먹기 시작했다. 당번인 날이 되면, 4교시가 끝나자마자 국어 선생님에게 간다. 선생님을 따라 급식실 앞에 길게 늘어진 줄을 지나쳐 굳게 닫혀 있는 급식실 문을 열고 입장한다. 굶주린 아이들이 부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밥을 최대한 빨리 먹고, 선생님에게 꾸벅 인사한 뒤 도서실로 달려갔다. 열쇠를 자물쇠에 꽂고 푼 다음, 문을 열어 전등을 켠다. 창문을 열어 환기한 뒤, 데스크 컴퓨터의 전원을 누른다. 빠르게 양치를 하고 온 뒤, 데스크에 앉아 책을 펴고 사람을 기다린다. 하나 둘 학생들이 한 손에 책을 들고 들어오면, 바코드를 들고 업무를 시작한다.


 당번인 날에도, 당번이 아닌 날에도 나는 데스크에 앉았다. 그곳에 앉아 고개를 푹 숙여 책을 읽는 아이들을 구경했다. 시험 기간이 되면 소설책이 문제집으로 바뀌고, 시험이 끝나면 텅텅 비어 파리를 날리는 풍경을 모두 눈에 담았다. 나는 3년 동안 도서부 활동을 했다.




 도서부 활동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전환점 중 하나다. 도서부가 아니었다면 책을 좋아하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필통을 열 때마다 중학교 도서실에서 받은 책갈피가 나를 반겨준다.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아늑하고 포근했던 도서실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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