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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 일기 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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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ug 07. 2024

(여자 사람) 친구

어른 되니깐 '친구' 앞에 '여자 사람'이란 말을 붙이더라


몸에 맞지도 않는 교복 입고 다니던 시절
여자애 놀리는 것만큼 재밌는 게 없었지
조폭이라고 놀리고 물건 뺏고 도망치고 실내화 뒤꿈치 콱 밟고
그러다가 등짝에 짝 소리 나게 얻어맞고 그랬지
그래 그때 우린 친구였어

그런데 어른 되니깐 '친구' 앞에 '여자 사람'이란 말을 붙이더라
아니 친구면 친구지 여사친은 대체 뭐냐고 항변해봐도
그 미묘하고 야릇한 뉘앙스에 홀린 사람들은
남녀 사이에 친구 없다며 열변을 토하고
카톡만 해도 여자랑 연락하냐며 부담스러운 관심을 보이더라

그렇게 나는 어른 된 대가로 친구 절반을 잃고
다시는 옛날과 같은 친구 만나지 못하게 되었어

노트에 그림 그리며 놀던
짝꿍이라서 손잡고 다니던
같은 아파트라서 서로의 집 놀러 다니던
교실에서 술래잡기하다 뒤엉켜 넘어지던
공부방 끝나고 놀이터에서 함께 그네 타던

그때 그 여자애들
이젠 친구 될 수 없겠지 어른이니깐


<(여자 사람) 친구>, 2022.2


<짝꿍>, painted by Midjourney




 뭇 남자애들은 여자애를 대하기 어려워한다. 초등학교 고학년 즈음만 되어도 숫기 없는 아이들은 이성 앞에 서면 말도 제대로 못 하고 벙어리가 된다. 하지만 나는 어째선지 여자애들을 대하는 게 어려운 적이 없다. 이러한 성격 덕분에 여자애들하고도 곧잘 친하게 지냈다.


 특히 초등학생 때는 같은 공부방에 다니던 여자애들하고 많이 어울렸다. 학교도 같고, 공부방도 같이 다니고, 아파트도 같은 곳에 살았다. 덕분에 공부방이 끝나고 함께 놀이터에서 놀거나, 서로의 집을 놀러다니며 게임도 하고 영화를 보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자 친구들은 서서히 멀어졌다. 공부방을 졸업한 탓도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연애' 때문이었다고 감히 생각한다. 우리 중학교 선생님들은 우리의 연애를 적극 권장했고, 몇몇 활달한 아이들은 공개연애를 하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남자애와 여자애가 같이 붙어만 있어도 "너네 사귀냐?"라는 핀잔과 함께 엉큼한 시선이 쏟아졌다. 중학생 아이들은 그런 분위기에 면역이 없다. 괜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는 이런 적도 있었다. 친구 집에서 같은 반 여자애와 카톡을 하고 있었다. 아마 수행평가 때문에 연락했던 걸로 기억한다. 갑자기 옆에 있던 친구가 "너 여자랑 카톡해?!"라고 소리치더니 내 폰을 뺏어갔다. 친구는 곧바로 여자애의 프로필 사진을 확대하더니, "별로 안 예쁜데?"하고 툭 말했고, 곧바로 다른 여자애 프로필 사진도 검사하기 시작했다. 기분이 나빠진 나는 바로 폰을 뺏었다.


 내가 기분이 나빴던 이유는 함부로 내 반 친구를 얼평하는 친구의 예의 없는 태도뿐만은 아니었다. 이제 여자랑 카톡만 해도 연애 쪽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게 된 친구의 모습이 슬펐다.




 이성 사이에 친구가 존재할까? 이 질문은 인터넷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곧잘 토론거리가 된다. 나는 친구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반대쪽 입장은 핏대를 세워가며 '절대 남녀 사이엔 친구는 없어!'라고 악지른다. 그 모습이 내게는 너무나도 서글프게 비친다.


 분명 어릴 때는 아무렇지도 않게 손 잡고 다니고, 같이 그네 타고, 서로 좋아한다고 말했는데. 왜 어른 된 지금은 '친구' 앞에 '여자 사람'을 붙이지 않으면 괜한 오해를 사는 지경까지 온 걸까. 어른의 저주인 걸까. 사람의 절반을 사람이 아니라 연애 대상으로만 인지하게 되는 끔찍한 저주에 걸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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