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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시 일기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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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비단 Aug 04. 2024

스무 살, 어른

우리는 사람에 파묻혀 우리를 잃었다


우리는 한때 같은 옷을 입었었다
우리는 한때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한때 아무 생각 없었고
그래서 한때 우리는 친구였다

스무 살이 되자
우리는 흩어졌고
낯선 곳에 떨어져 새 사람을 만나
다시 우리가 되려고 노력했지만

우리는 서로 친해지는 법도 까먹어
애매하게 아는 사람만 자꾸 늘어갔고


교복을 입고 음료수 한 잔에 고민을 나누던 우리는
술 없이는 대화 하나 못 하는 어른이 되어서
안부 인사조차 쉬이 건네지 못한 채
어색한 웃음만 서로 주고받았다

어른이 된 걸 후회한다
어른이 된 게 후회스럽다
나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영원히 학생이고 싶었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고
내 사람도 하염없이 변해가고

우리는 사람에 파묻혀 우리를 잃었다
우리는 시간에 휩쓸려 우리를 잊었다
내 사람은 도대체 어디에 있나
내 사람은 모두 옛날에 두고 왔나



<스무 살, 어른>, 2019.5


2019년 5월, 어딘가의 식당에서


 인간관계에 있어 나는 항상 소극적이었다. 먼저 다가가는 경우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 대화하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해 본 적이 없다. 낯선 이는 두려움과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선천적 슈퍼 I가 분명하다.


 학창 시절, 친구를 사귀는 과정은 운의 영역이었다. 누군가 내게 다가오면 친해지고, 아니면 1년 동안 아무 말도 섞지 않고 헤어진다. 지금 남은 친구들도 비슷하다. 어쩌다 같은 반이 되고, 어쩌다 말을 트게 되고, 어쩌다 친해졌다. 그 과정에 내가 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 모두 상대가 다가왔고, 상대만 노력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은 이렇게 살아도 큰 문제가 없었다. 학교는 내가 싫어도 30명 가까이 되는 또래들과 하루 종일 함께 지내야 하니 가만히 있어도 친구가 생겼다. 하지만 대학생이 되니 사정이 달라졌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나마 같은 과 동기 4, 5명 정도 친해진 게 다였다. 타과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과 동기 중에도 한마디 섞지 않고 졸업한 사람도 있다.




 대학교 1학년,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났다. 고등학교 방과 후 시간에 친해진 같은 반 친구들이었다. 대체 어떻게 친해진 건지 모르겠다. 내가 놀리는 맛이 있었던 걸까. 여자애들의 감성은 남자가 죽어도 이해하지 못할 차원에 있는 것 같다.


 반년 만에 만난 우리는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대학교 어냐, 지난 MT 때 무슨 일이 있냐, 군대 가면 면회 가주겠다.... 지금 와선 기억도 안 나는 얘기를 몇 시간 가까이 나누었다.


 1년 후 코로나가 유행하여 만나서 놀자는 말은 누구도 꺼내지 못했다. 점차 연락하는 빈도가 줄고, 생일 때 주고받던 선물도 사라지더니, 이제는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지금 이 친구들은 내가 군대에 와 있는 줄도 모른다.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근황을 엿보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나는 인간관계라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어릴 때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 어른이 되자 술 없이는 진솔한 대화 하나 못 하는 바보가 되는 것이. 한때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고민을 나누던 친구들이, 스무 살이 되자 서로 생사도 모르는 사이가 되는 것이. 사람과 한없이 가까워졌다가, 사람에 파묻히고 시간에 휩쓸려 서로 영영 멀어지는 것이. 이런 게 어른이라면, 나는 차라리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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