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빛 가로등 아래로 아스팔트가 흘러내린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오르막길을 오른다. 임대 딱지 상가건물 귓불에 네온사인이 매달려 있다. 주기적으로 찬란을 내뿜던 녀석은 내 빈 잔에 네온을 채웠다. 잔을 가득 채운 것을 한입에 쭉 들이켜 쩍 벌린 아가리 위로 탁탁 털며 나는 자꾸만 술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았다.
악착스런 겨울바람이 달려든다. 후드를 푹 뒤집어쓰고 어금니를 악문다. 네온이 침잠하는 가운데 나는 오르막길을 오른다.
<겨울과 어금니와 침잠하는 네온>, 2024.2
<네온사인 겨울>, painted by MS Image Creator
나는 한 동네에 20년 가까이 살았다. 초등학생 때 걸어다니던 길을 20대 중반이 되어서도 똑같이 걷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는 내게 묻는다. 같은 동네에 그렇게 오래 살면 질리지 않냐고. 나는 이러한 질문의 요지를 모르겠다. 공간과 장소에 어떻게 질릴 수가 있을까. 오히려 정이 들고 익숙해지고 안 떠나고 싶지 않나.
임용고시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나서도 나는 여전히 이 동네에 있었다. 군대에 가기 전까지 도서관에 다녔다. 집에 죽치고 앉아 있기 뭐 해서 자격증 공부나 독서, 글쓰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도서관 가는 길에는 초등학생 때부터 있던 건물이 하나 있다. 1층에는 치킨집이 있고, 2층에는 피시방, 3층은 당구장, 4층은 학원이 있었다. 초딩 때 친구들이 이 학원에 많이 다녔다. 공부방이 끝나고 건물 옆 놀이터에서 저녁 늦게까지 놀아도, 학원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 건물은 영원히 빛날 것만 같았다.
도서관에서 글을 쓰고 집에 돌아가는 오르막길이었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건물을 바라봤다. 건물에 '임대'라고 쓰인 큼직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다. 그 건물은 피시방과 학원은 진작 망한 상태였다. 그 사실을 나는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이다.
실패자 신분의 나는 임대 딱지를 보며 가라앉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고개를 땅에 처박고, 후드를 푹 눌러쓰고, 어금니를 악물었다.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나는 동네에 질리지 않는다. 같은 동네에 20년 동안 정체되어 있는 나 자신에게 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