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장 : 사건의 시작 2020.07.31

by 꿈꾸는나비


아이는 딸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초음파 사진으로 봤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다. 느낌은 뭐랄까…… 외계인을 처음 보면 이런 기분일까, 아내의 자궁은 하얀색 갯벌 같은 곳인가? 한 생명이 이렇게 갑자기 쑥 나타날 수 있는 건가?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기분이었다. 헝클어진 생각들로 가슴이 쿵쾅거리다 못해 심장이 갑자기 지하 저 깊숙한 곳으로 떨어지고 시간은 멈춰버렸다. 아이를 받아 들고 아내의 얼굴을 봤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땀이 범벅이 된 아내가 나와 아이를 보고 웃었다. 둘이 셋이 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핸드폰이 울렸다. 아내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미소가 사라지고 저 깊숙한 곳으로 떨어진 심장이 다시 돌아온 순간이었다.


종현은 경찰서 현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형수랑 아기는요? 아기는 예뻐요?”

“ 진통을 좀 오래 하긴 했는데 둘 다 괜찮아. 내가 문제지.”

“ 형수가 그래도 보내주셨네요.”

“ 응. 최대한 빨리 오겠다고 나왔는데 내가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가는 길에 정리 좀 해봐”

“ 학회가 열리던 곳에서 끝나고 연회가 열릴 예정이라 잠시 휴식 시간이었고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대요. 그런데 지하주차장에서 이상한 물건을 가지고 내리는걸 경호원이 본 모양이더라고요.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폭탄에 타이어를 맞추고 있더래요. 경호원이 가까이 가는 것도 몰랐나 봐요. 학회에서 고용한 경호원이었는데 VIP 차량 근처에서 대기 중이었대요. 바로 제지하고 신고했대요. 우리 쪽에 연락이 오고 좀 전에 취조실로 데려갔어요. 그런데 그 교수….. 좀 이상해요”

“ 뭐가?”

종현이 난처한 얼굴로 대답했다.

“ 종이에 계속 원을 그려요.”


취조실에 나, 종현, 우리 팀 막내 선애가 들어섰다. 교수는 테이블에 앉아 종이에 볼펜으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자 보안팀 담당자와 팀장이 테이블에서 물러나 우리 쪽으로 왔다. 팀장은 굳은 얼굴로 다가와 들릴 듯 말 듯 한 소리로 옆 방에 있겠다고 하고는 인이어를 손에 쥐어주고 문을 열고 나갔다. 테이블에 앉은 교수는 하얀 종이 위에 천천히 원을 그리고 그 위에 같은 원을 반복적으로 그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팀장이 앉아 있던 의자에 숨죽이며 앉았다. 내 뒤로 종현과 선애가 벽을 등지고 섰다. 그는 주변의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듯, 하던 일에 열중해 있었다. 그 모습이 규칙적이고 의미가 있는 것 같아 계속해서 그의 손끝을 쫓아갔지만 그냥 원에 가까운 형상에 지나지 않았다. 반복되는 행동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어 보였다. 과잉행동 장애인지 긴장을 풀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종이와 펜을 달라는 교수의 요청에 팀장이 주저하다 내줬다는 걸 보면 저걸 내어준 게 효과가 있었나 보다. 그는 종이와 펜을 차지하고 나서야 질문에 답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컴퓨터 모니터 그동안의 진술이 쓰여 있었다. 한 문단을 훑고는 나는 질문을 이어갔다.

“ 학회 발표 끝내시고 지하주차장으로 가신 건가요.”

“네. 제가 마지막 발표자였어요. 발표가 끝나자마자 주차장으로 갔어요”

그렇게 끄적거리던 볼펜의 잉크가 떨어진 모양이다. 그는 아직 하얀 종이의 공백에 볼펜을 다시 끄적거린다. 잉크가 나오다 끊기기를 반복하다 결국 종이에 더 이상 잉크는 묻어 나오지 않는다. 그걸 알면서도 그는 계속 아까와 같이 반복된 원을 끄적거린다. 행동 장애나 편집증적인 증상일까……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에 종현과 잠시 눈을 마주쳤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러나 선애는 미동도 하지 않고 계속 그의 모습을 주시한다. 어느 순간 그의 손이 멈췄다. 그는 선애에게 혹시 볼펜이 있으면 빌려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본다. 그가 여기 와서 우리에게 처음 한 질문이다. 순간 적막이 흘렀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대답을 계속 들으려면 그의 편집증적인 행동을 이어 나가게 해야 한다. 나는 선애에게 볼펜을 주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선애는 긴장한 모습으로 수첩 사이에 끼여 있던 볼펜을 그에게 건넸다. 그는 볼펜을 받아 다시 종이에 아까와 같이 볼펜을 끄적거리기 시작한다. 찌그러진 원 모양이 다시 종이에 시작된다. 그것도 잠시 다시 볼펜에서 잉크가 떨어진 듯 잉크가 나오다 말다 반복한다. 그는 나오지도 않는 볼펜으로 계속 투명한 원을 그려낸다. 우리는 다음 질문을 준비한다.

“ 그래서 회의장을 나와서 혼자 주차장으로 가신 건가요. 차에 있던 폭탄에 타이머를 세팅하고 있던 거였고요? 폭탄은 구한 건가요 직접 제작한 건가요?”

나오지도 않는 볼펜으로 원을 그리던 그의 손이 멈췄다. 나는 볼펜이 있나 안주머니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북극곰이 몇 마리 남았지?”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갑자기 북극곰이라니…… 그러고는 그는 볼펜으로 그리던 원을 찢으며 물었다.

“북극곰이 몇 마리 남았지?”

인이어 너머로 뭐라고 하는 거냐는 팀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그의 이상한 질문에 긴장한다. 그런데 모두는 아니었다. 갑자기 선애가 대답을 한다.

“287마리요.”

대체 무슨 소리야? 북극곰은 뭐고 선애가 왜 그의 질문에 대답하는 거야. 그는 찢은 종이를 입에 구겨 넣더니 질겅질겅 씹으며 희미하게 웃는다.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의자에 앉은 채 선애를 돌아보는 순간 그가 갑자기 책상에 머리를 박으며 쓰러진다. 주위가 소란스러워진다. 갑자기 취조실 안의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한 컷 한 컷 사진을 찍는 느낌이 들었다. 책상 앞으로 고꾸라지듯 엎어지는 교수와 달려가 그를 일으켜 세우는 나, 취조실 밖에서 뛰어 들어오는 팀장과 동료들, 파랗게 질려가는 그를 눕히고 그의 맥을 확인하는 나, 그리고 멍하니 서있는 선애, 다급히 누군가를 부르는 종현, 숨이 멎어가는 그를 보며 심폐소생술을 하는 나, 그리고 여전히 미동도 없이 서있는 선애……

그렇다. 선애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가 누구이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그런데…… 대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