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오후 팀장은 나를 불렀다. 선애의 어린 시절의 얘기를 듣고 종현에게 조사를 시켰다고 했다. 선애의 집에서는 아직까지 특별한 게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손에 봉투를 하나 쥐어 주었다.
“많이 못 넣었어. 아기 옷이라도 사줘. 그리고 하루 휴가 줄 테니 모레 아침에 나와.”
“팀장님!”
감사의 인사도 받지 않고 팀장은 서둘러 돌아섰다. 늘 그렇듯 팀장은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돌아섰다. 해야 할 말만 하고 해야 할 일만 하는 사람. 그런 그에게도 이번 일은 힘든 일일 거다. 자기 딸 또래의 선애를 알게 모르게 챙겨줬으니. 우리 팀원의 사건을 우리가 조사한다는 비난을 감수하고 팀장은 청장과 맞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했다. 우리는 꼭 밝혀내야 한다. 조리원에 갈 준비를 하러 자리에 돌아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갑자기 하던 대화를 동시에 멈췄다. 사무실을 같이 쓰는 3개의 팀은 허물없이 지내는 동료들이지만 이번 사건으로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어색한 사이가 됐다. 우리 팀원도 공범 일지 모른다는 의심의 눈과 선애에게 배신당했다는 동정의 눈이 동시에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런 시선을 느끼며 통로를 지나 자리에 앉기까지가 오늘 하루 가장 힘든 일인 것 같았다. 자리에 앉아 선애의 자리를 바라봤다. 선애의 책상은 이미 깨끗하다. 정보실에서 증거물로 다 가져간 후다.
선애는 누구인가. 나는 선애를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이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멍하니 책상에 앉아 왜 자리로 돌아왔는지도 잊은 채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책상 위 바나나가 이미 새까만 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나나의 노란색은 이제 별로 보이지 않는다. 까만 작은 점들이 퍼져 커다란 점으로 커지고 있는 중이다. 초파리가 바나나를 맴돌며 탐내고 있다. 선애가 왜 바나나를 들고 눈물을 흘렸는지 왜 그때 나는 묻지 못했을까? 왜…… 그때 물어봤다면 선애에 대해 지금보다 알 수 있었을까? 종현이는 물어봤을까? 번뜩 종현이는 물어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304호, 꽃과 케이크는 사양할게. 대신 빨리 와.’ 아내의 문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맞다, 조리원. 서둘러 서랍에서 지갑과 차 키를 꺼내고 검은 바나나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 벌떡 일어났다. 까마득했던 사무실 통로를 이번엔 순식간에 건너며 종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 8번을 넘겨서야 종현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과장님. 그렇지 않아도 전화를”
“어, 그래 종현아. 너 혹시 선애가 처음 온 날 내가 준 바나나 보면서 울었던 거 기억나니?”
“네? “
종현의 기억은 지금 3년 전으로 이동 중이다.
“네. 기억나죠.”
“혹시 그때 왜 울었던 건지 물어본 적 있어?”
종현은 대답이 없다. 건물 밖으로 나와 주차장에서 차키를 눌러본다. 삐빅 소리와 함께 라이트가 번쩍이며 종현 대신 차가 대답한다. 주차장 오른편 끝에서 팀장이 누군가를 부축하며 차에 태우는 모습이 보인다.
“종현아 내 말 듣고 있어?”
“네, 듣고 있어요. 제가 좀 친해진 후에 물어본 적 있는데 자기가 좋아하던 사람이 바나나를 좋아했다고 했어요. 네, 그렇게 대답했었어요. 근데 갑자기 왜요?”
“혹시 그게 누군지도 물어봤어?”
“아뇨, 혹시라도 헤어진 남자 친구인가 싶어 더 이상 묻지는 않았어요.”
“아 그래…… 그냥 갑자기 그때가 생각나서. 내가 선애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거 같아서.”
아닌가… 아는 게 없는 건가. 운전석에 앉으며 말을 이어보려 하지만 다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혹시 나나 할머니에 대해 종훈이에게 얘기한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침묵을 깬 건 종훈이었다.
“ 저 지금 지방에 내려와 있어요. 선애 주민등록등본상 어릴 적 거주지가 있던 곳이요. 그런데 과장님. 선애가...... 선애가 아닐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