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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머리 짐승 Jul 09. 2020

믿음, 소망, 사랑 3

아내 편

아내는 아마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저녁 먹을 준비까지 해 놓았을 겁니다. 제가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지금 뒤뜰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아내가 염치도 없이 마구 자라나는 여름 꽃나무 가지를 잘라내는 모양입니다. 제가 아침 먹으면서 그랬대요. “아휴, 요즘 시간도 없는데 저 나무는 벌써 저렇게 자랐네”


매콤 달콤한 냄새가 방으로 올라옵니다. 아내가 짬뽕을 끓이나 봅니다. 저녁에 뭘 먹고 싶냐는 물음에 음식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라면은 먹기 싫은데 얼큰한 건 먹고 싶다 했거든요.


“내일 대청소할 거야” 금요일 아침 제 예고에 아이들이 긴장합니다. 속으로만 한 마디 붙입니다.‘괜찮아 얘들아. 내일 아침에 엄마가 방 정리 같이 해 줄 거야’


“얘들아, 아빠 화장실 다녀오신대” 밖에서 밥 먹을 때 ‘화장실 다녀오다’는 ‘담배 피우러 다녀오다’의 뜻을 지닙니다. 아이들은 아직 제가 담배 피우는 줄 모르거든요.


“자기 오늘 좀 나갔다 오면 안 돼? 나 혼자 애들이랑 집에서 시간 좀 보내고 싶어” 제게는 반드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아내는 압니다.


“주방 정리 다 했다! 나 샤워할게” 욕실로 올라간 아내의 꽁무니를 스치듯 주방으로 들어갑니다. 갈 곳 없어 수납장 위에 놓인 작은 주방 용품들과 쓸지 말지 결정할 수 없는 오래된 그릇들을 적당한 위치에 가져다 놓습니다.


아내가 빨래를 개켜 올라옵니다. 다시 아내의 꽁무니를 스쳐 거실로 내려갑니다. 분명히 짝 잃은 양말 한두 짝, 손님용 화장실 타월은 식탁 의자에 남아있을 겁니다.


상자를 가열하게 열어젖힌 아내는 주문한 옷들로 패션쇼를 엽니다. “이거 어때? 이건? 잘 어울려?” 제 역할은 뻔하지 않은 찬사를 보내는 일입니다. 만면이 밝아진 아내는 원피스와 치마를 옷장에 걸어놓고 내려갑니다. 아, 참 제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택배 상자와 포장 비닐, 가격표를 모아 버려야 하거든요.


소파에 앉아 못 본 인스타그램을 업데이트하는 아내에게 비장하게 말합니다. “여기 싸인 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으며 아내 또한 묻지 않습니다. 아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공문서 처리를 그렇게 해치웁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여야 하는 토요일입니다. 제 역할인 청소기 돌리기에 앞서 세탁기부터 돌립니다. 아마 청소 다 하고 나면 빨래도 다 돌아가 있을 겁니다. 물론 양말 짝을 맞추고 손님용 타월도 빼먹지 않고요. 회식하고 돌아온 아내는 그러겠죠? “왜 내 일을 자기가 했어? 내가 하면 되는데” 내일은 늦잠 조금 더 자도 되겠어요.


아내라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정의할  없는 즐거움이고 분류할  없는 문제 투성이며 아무것도 아닌 설렘이고 눈물 나는 감격이 아닌 눈시울을 서서히 데우는 감동입니다. 연애할 때는  사람 만나면 뭐할까 했다면 지금은  사람 없으면 뭐하지 합니다. 연애는 셀린느 디온이 부른 ‘The power of love’,  가운데 ‘Cause I’m your lady~’ 멜로디와 같았다면 지금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바닷가 왈츠 장면 배경 음악,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아내와 한날한시에 눈을 감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그 순간까지 이렇게 경쾌하게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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