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편
아내는 아마 아이들 숙제를 봐주고 저녁 먹을 준비까지 해 놓았을 겁니다. 제가 어제 마무리하지 못한 글이 있다는 걸 알고 있을 거예요.
지금 뒤뜰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걸 보니 아내가 염치도 없이 마구 자라나는 여름 꽃나무 가지를 잘라내는 모양입니다. 제가 아침 먹으면서 그랬대요. “아휴, 요즘 시간도 없는데 저 나무는 벌써 저렇게 자랐네”
매콤 달콤한 냄새가 방으로 올라옵니다. 아내가 짬뽕을 끓이나 봅니다. 저녁에 뭘 먹고 싶냐는 물음에 음식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라면은 먹기 싫은데 얼큰한 건 먹고 싶다 했거든요.
“내일 대청소할 거야” 금요일 아침 제 예고에 아이들이 긴장합니다. 속으로만 한 마디 붙입니다.‘괜찮아 얘들아. 내일 아침에 엄마가 방 정리 같이 해 줄 거야’
“얘들아, 아빠 화장실 다녀오신대” 밖에서 밥 먹을 때 ‘화장실 다녀오다’는 ‘담배 피우러 다녀오다’의 뜻을 지닙니다. 아이들은 아직 제가 담배 피우는 줄 모르거든요.
“자기 오늘 좀 나갔다 오면 안 돼? 나 혼자 애들이랑 집에서 시간 좀 보내고 싶어” 제게는 반드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아내는 압니다.
“주방 정리 다 했다! 나 샤워할게” 욕실로 올라간 아내의 꽁무니를 스치듯 주방으로 들어갑니다. 갈 곳 없어 수납장 위에 놓인 작은 주방 용품들과 쓸지 말지 결정할 수 없는 오래된 그릇들을 적당한 위치에 가져다 놓습니다.
아내가 빨래를 개켜 올라옵니다. 다시 아내의 꽁무니를 스쳐 거실로 내려갑니다. 분명히 짝 잃은 양말 한두 짝, 손님용 화장실 타월은 식탁 의자에 남아있을 겁니다.
상자를 가열하게 열어젖힌 아내는 주문한 옷들로 패션쇼를 엽니다. “이거 어때? 이건? 잘 어울려?” 제 역할은 뻔하지 않은 찬사를 보내는 일입니다. 만면이 밝아진 아내는 원피스와 치마를 옷장에 걸어놓고 내려갑니다. 아, 참 제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택배 상자와 포장 비닐, 가격표를 모아 버려야 하거든요.
소파에 앉아 못 본 인스타그램을 업데이트하는 아내에게 비장하게 말합니다. “여기 싸인 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으며 아내 또한 묻지 않습니다. 아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공문서 처리를 그렇게 해치웁니다.
내일은 아침부터 바삐 움직여야 하는 토요일입니다. 제 역할인 청소기 돌리기에 앞서 세탁기부터 돌립니다. 아마 청소 다 하고 나면 빨래도 다 돌아가 있을 겁니다. 물론 양말 짝을 맞추고 손님용 타월도 빼먹지 않고요. 회식하고 돌아온 아내는 그러겠죠? “왜 내 일을 자기가 했어? 내가 하면 되는데” 내일은 늦잠 조금 더 자도 되겠어요.
아내라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건 정의할 수 없는 즐거움이고 분류할 수 없는 문제 투성이며 아무것도 아닌 설렘이고 눈물 나는 감격이 아닌 눈시울을 서서히 데우는 감동입니다. 연애할 때는 이 사람 만나면 뭐할까 했다면 지금은 이 사람 없으면 뭐하지 합니다. 연애는 셀린느 디온이 부른 ‘The power of love’, 그 가운데 ‘Cause I’m your lady~’의 멜로디와 같았다면 지금은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의 바닷가 왈츠 장면 배경 음악, 쇼스타코비치 왈츠 2번을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아내와 한날한시에 눈을 감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그 순간까지 이렇게 경쾌하게 사랑하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