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잘하는 일, 돈 버는 일이 되게 하려니 두려웠다. ‘문송합니다’가 만연하기 이십여 년 전, 국문과 대신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것도 반 이상은 그 두려움 때문이었다. 두려움을 피해 우회로로 진입, 신학교에 들어갔고 교회 교육 간사를 거쳐 대안학교 교사가 되었다.
대안학교에서 우스운 월급을 받았지만 돈 쓰는 일에 관심과 흥미가 적다 보니 매월 여섯 자릿수 수입으로도 먹고 살 수 있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자 사정이 달라졌다. 외벌이 남편이 생계를 책임졌고 나는 가사와 육아를 전담했다.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생각도 필요없었다. <선녀와 나무꾼>을 보라. 자식이 셋이면 제 아무리 선녀라도 날개옷을 장착해 보았자 날 수가 없다. 이번 생에는 다시 날기 글렀으니 입 다물고 밥을 지었다. 서당 개는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주방 개는 솥으로 들어간다. 나는 나를 끓이고 있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한 특제 메뉴 : 인신 공양 보신탕이라고나 할까.
냄비가 끓어 넘치는 것을 방지하려면 뚜껑을 살짝 열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또 두려움 때문에 내 뚜껑을 열지 못했다. 뚜껑에서 나오는 김을 남이 보는 순간 나의 우아, 폼, ‘가오’가 망가질까 염려했다. 이서희 작가의 <이혼일기(아토포스)>를 읽으며 그런 염려와 두려움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결혼 생활에서 중도 하차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자식과 부모 때문에, 혹은 돈이 없어서 마음으로 그쳐야 하는 이들에게 작가는 ‘대리 만족의 축복’을 부어준다. 특히, 종교적인 신념이 강해 무의식 밑바닥에서부터 ‘이혼은 사탄의 초대’ 같은 문구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나 같은 사람에게 작가의 수려한 문장은 그야말로 ‘송이꿀보다 더 달콤(시편 19:10)’ 했다.
달콤도 잠시, 해는 넘어가고 여섯 시는 돌아오니 밥을 지어야 한다. 밥 지으며 글 짓는 분으로 첫손에 꼽을 분은 단연 은유 작가님이다. 주부이자 아내요 엄마면서 작가인 분이라 그분 문장에서는 밥 냄새가 난다. 특히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서해문집)>에서는 부글부글 밥 끓어오르는 소리까지 났다. 그 소리는 쌀알이 익는 소리면서 사람 속이 타는 소리였다. 작가의 '울컥'이 마침표마다 방울져, 내 '울컥'을 끌어냈다. 격한 공감 때문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평소보다 빠르게 글을 읽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쉼표에서 작가의 ‘찡찡’이 들리자 내 안 어딘가에서 꼰대적 음성이 들려왔다. “자식을 낳았으면 어떻게든 밥을 지어 먹여야지, 밥 짓기 싫다는 거냐? 사랑은 밥이니라.”
사랑이 꼭 ‘밥’이어야만 할 필요는 없는데도, 나는 밥에 집착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빵이라 하셨건만, 요리 연구가의 딸인 나는 태생적 한계를 벗지 못했다. 내 귓가에 맴도는 꼰대적 음성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양혜원의 <교회 언니, 여성을 말하다(비아토르)>를 읽었다. 목사 사모이자 여성학자인 저자가 자신의 이름과 언어를 되찾기까지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나만 삽질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했다. 내 신념의 팔 할인 기독교, 그 기독교 안에 스며든 유교적 가부장제와 가족주의로 인해 입 다물고 밥 짓는 것이 미덕이라 믿었던 것이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수다의 자유를 봉인했다가 끓어 넘쳐 우울증과 불면증, 무기력증에 걸렸던 나의 이야기를 ‘간증’할 수 있게 되었다(저 지금 책 광고하고 있습니다 - 공저자와 함께 쓴 <자매님들의 강박 이야기(깃드는숲)>, 올해 나옵니다).
인류 역사에서 꽤 오랜 기간 동안 노예는 짐승이나 다름없었고 흑인은 백인과 동등할 수 없었다. 여성이 차별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시간의 압박을 이겨낼 용기를 레이첼 헬드 에반스의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본 1년(비아토르)>에서 얻었다. ‘성경적 여성’에 대한 선입견과 잘못된 지식, 특히 잠언 31장에 나오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현숙한 여인’에 대한 오해를 떨칠 수 있었다. 그 결과 나의 종교적 신념을 갖다 버리지 않으면서도 나의 여성성을 긍정하고 힘들지만 기쁘게, 그리고 적당히 밥을 지을 수 있었다.
“잠언 31장 여인이 스타인 이유는, 그녀가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했느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용감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일을 하라. 오래된 가구를 보수한다면, 용감하게 하라. 두 살배기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용감하게 하라. 인신매매에 대항해 싸운다면 … 회사를 운영한다면 … 혹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일을 해 주도록 만들고 있다면, 용감하게 하면 된다. 위험을 감수하라. 열심히 하라. 실수하라. 내일 아침에 일어나라. 그리고 당신 주위에 당신을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게 하라(위의 책, 147쪽).”
7년의 경력 단절을 뒤로하고 다시 일하게 되면서 내 ‘식식’은 현저히 줄어들었다. 나는 더이상 타자를 위해 존재하는 아내로 살지 않을 것이다. 타자를 나의 '아내화'하고 싶은 유혹이 있겠으나 그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쓸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내 집에는 아내가 없다. 내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능력과 소질에 따라 가사 업무를 분담했으니, 더는 '전업주부'도 없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분을 따라, 용감하게 내 안의 아내와 주부를 죽이고 나와 남을 살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