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고 답하는 삶
아파트 후문에 서 있다가 태권도 승합차에서 내리는 동생 받아와라, 쌀 두 컵 씻어서 밥솥에 넣고 눌러라, 빨래 건조에 넣어놓은 빨래 개고 세탁기 안에 탈수된 빨래 널어라, 청소기 돌려라, 식탁 닦고 수저 놓아라, 오늘은 엄마가 많이 피곤하니 설거지도 해라.
각종 집안일 요청에 대한 내 집 중2님의 대답은 한결같다. 딱 한 마디, ‘어’다. 다른 잡말은 없다. ‘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의 입에서 짧고 단호한 ‘네’가 나올 때는 언짢은 경우다. 여기에다 비아냥을 섞어서 ‘네네’라고 할 때도 가끔 있다. 아이패드 붙들고 침대에 모로 누워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미국 드라마에 심취해 있을 때, 엄마가 “그만 좀 봐라.” 하면 “네.”, 그러고도 자세를 바꾸지 않아서 “너 그러다 뭐가 될래?” 하면 “네네.” 라고 답한다.
중2님과 엄마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있다. 그는 엄마에게 어리광을 부리거나 다정, 살갑게 구는 아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 요청에 ‘응’이라 답하지 않는다. 콧소리 나는 [ŋ]은 그의 ‘시크한 캐릭터’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가 ‘어’ 대신에 ‘알았어’라 답하지 않아 다행이다. ‘알았어’는 언제 들어도 일관되게 기분 나쁘다. 상대방이 ‘알았어’라고 말하면 그건 내 앞말을 접수했다는 뜻이고 내 요청에 따르겠다는 표현인데도 그렇다. 바닷물에 포함된 3%의 염분처럼, ’알았어’에 들어있는 약간의 짜증 때문일 것이다. 중2님이 ‘알, 았, 어’ 3음절을 다 발음하기 귀찮아 ‘어’로 줄인 건 아닌가 의심해 보았으나 그 ‘어’에는 그의 불쾌한 감정이 섞이지 않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어’의 반(半)언어적 요소인 어조를 분석한 결과다. 높낮이 없는, 중국어 성조 1성,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 평성의 ‘어’는 담백하다.
중2님이 내 집에 사는 동안 그의 입에서 계속 ‘어’가 나올 수 있도록, 나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지시 사항은 내리지 않으려 한다. 전교 1등 해라, 게임 하지 마라, 여자 친구 사귀지 마라, 어른 말씀에 순종해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해라...... 그는 제 손으로 밥해 먹고, 제 방과 주변을 치우고, 할 수 있는 만큼의 자기 일을 하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음악을 벗 삼아 신의 은총 아래에서 겸손하고 당당하게 자존을 지키며 살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어’라고 답하며 그러한 삶을 연습해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