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지상의 일들을 내다 버린다

by 왜살지

거듭 생각하지만 읽히기 위한 글은 가련한 허영에 다름아니다. 나는 형체가 있는 영광을 바라선 안 된다. 동시대인들과 멀어질 수 있기를. 글은 완벽한 헛됨으로써 헛됨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럼에도 굳이 날 지금 읽겠다는 사람들. 난 그들을 기이한 눈으로 쳐다봐야 할 것이다. 내 글에서 정액의 냄새나 시체의 냄새가 나지는 않으신가요?

그럼에도 읽히길 바라는 나. 거울엔 은화에 입맞추는 유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유다를 없애기 위해선 거울을 돌리면 된다. 그러나 어디를 향해서? (존재하지 않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은 거울에 반사되지 않는다.

눈 없이 그저 쓰는 손.


문학이 일종의 금욕주의라면, 그리스도는 문학의 본보기일까? 문학은 그를 따라 죽고 구원의 길을 걸어야 하는가?

그리스도가 구원의 약속이고 구원의 예시라면. 정작 구원은 그만을 위한 것 아닐지? 나머지 모두에겐 희망뿐. 너무 강한 빛은 눈을 멀게 하니까.

유다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는 모두와 함께 지옥을 추구했다. 유다는 죄를 지었기에 인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원과 무가 같은 것이라면(적어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둘은 방법은 달라도 종점은 똑같다고 봐야 하려나? (예수는 사기와 허언으로 덧칠한 진지함과 비극으로, 유다는 솔직함과 희극을 곁들인 핍진성으로. 대신 예수의 빛은 예수 대신 유다를 보이게 한다.)



문학의 순수함이 가능할까? 문학은 굴복의 순간에 사라짐으로 존재하는 것 아닐까. 오르페우스가 에우뤼디케를 욕망한 순간처럼.


노동은 영혼을 산란시킨다. 식사처럼 노동이 넘어가지는 날이 올는지. 지하철에서 지상의 일들을 내다 버린다. 지옥으로 향하며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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