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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언어

에싸위라에 남겨진 말

by 오션뷰

하지 못한 말이 점점이 남겨져 있는 곳이 있다. 그곳에선, 남겨진 말들이 탑처럼 쌓아 올려 있기도 하고, 바닷속을 자유롭게 헤엄치며 있기도 하다. 또 어떤 말은 끝내 뱉어지지 못하고 남겨졌다는 사실에 밤새도록 울부짖기도 하고, 또 어떤 말은 얌전하게 남겨진 모양새를 되찾기도 한다.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말, 삼키고 삼켜 얼굴조차 완벽히 만들어지지 못한 말, 수 천 번을 곱씹고 또 곱씹어 보다 이내 가슴에 멍울진 말. 그 말들은 날개를 달지 못해 전해지지 못한 건지. 혹은 그 어떤 말들보다 느렸기에 생각의 호수에 너무나 깊게 빠져버렸던 건지. 혹은 너무나 게으른 탓에 전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던 건지. 그 말들은 그렇게 남겨져 기억의 뒤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말들은 뱉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쓸모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그 순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우리에게 잊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하면서도 그 순간을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우리가 다시는 찾지 못할 거란 걱정을 하면서도 그 순간에 그대로 스며들어 있었다.

우리는 에싸위라(Essaouira)에 남아있었다. 우리가 함께 쌓아 올렸던 시간은 그 어떤 계절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 어떤 눈초리에도 반응하지 않고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끈기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남아있는 모양새가 여전할 뿐이다.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하더라도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내려 끙끙거리며 계속해서 애써보아도 보이지 않던 서로의 모습이 에싸위라에선 그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흩뿌린 이야기의 씨앗들은 어느덧 만개한 꽃이 되었다. 그 향기 그곳에서 지지 않고 언제든 준비된 자세로 향기로웠다.


우리의 모습은 억지스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감히 어땠으리라 쉽게 꺼내지 못하던 당시의 감정이 다시금 피어올랐고, 그 피어올라 싹을 띄우는 과정이 사라진 것이 아님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손 끝에 닿진 않더라도, 우리가 주고받았던 말들은 아직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초라하지도 않았고, 추위에 떨고 있지도 않았다. 우리가 주고받은 언어들이 한데 모여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 온기가 조금은 전해지는 것도 같았다. 다시금 안아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하게 그것은 존재했다. 네가 건네었던 물음표들은 나에게로 와서 쉼표가 되었으며, 내가 건네었던 마침표들은 너에게로 가서 느낌표가 되었다. 그들이 춤을 추는 자태는 그리 우아하지도 그리 멋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우리의 기억 속에 머물던 한 켠일 뿐이었다. 달콤하다 여겼던 문장들, 혹은 날카로워 상처를 내었던 문장들.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여전히 맴돌고 있었다. 서로 낯가리지 않고 어우러져있었다.




‘하게 될 말’은 언젠간 하게 된다. 많이 늦어 잊히더라도, 잊힌 언어들을 풀어낼 수 있는 기회는 다가온다. 예고는 없지만 언제나 찾아온다.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웅얼거렸던 말을 뱉는 순간은 다가온다. 그것은 비와 함께 찾아오기도 하고, 누군가를 너무나 짙게 떠올리는 순간 찾아오기도 한다. 그때 그 순간처럼, 다시 그 상황이 내 곁에 머물다 가는 것처럼, 여전히 잡을 순 없지만 다시 한번 공존할 수 있기에 그걸로 충분히 위안이 되는 그런 시간이다.

분해된 언어들을 붙이고, 그 사이를 매끄럽게 다듬어 조심스레 뱉어본다. 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붉은 와인이 입술 사이를 가득 매워 끈적인다. 그 사이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아 힘겹게 벌려본다. 쇳소리로 나오는 언어들이 너에게 가느다랗게 다가가면, 나의 문장들이 너의 곁을 맴돈다. 맴돌고 맴돌아 이내 휘감는다. 너에게 차마 닿지 못했던 나의 말들이 다시 생명력을 얻는 순간이다.

어쩌면 지금껏 단 몇 마디의 문장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공간을 견뎌왔을지도 모르겠다. 바가모요 해변에서 등에 업은 잔잔한 파도들은 사하라 사막의 열기에 식었고,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잔뜩 품은 바람은 리스본에서 온갖 방향으로 흩어졌다. 문장들은 보이지 않는 둥지를 틀고, 줄지 않는 먹이를 저장해두었다. 동쪽에서 서쪽 끝, 세상의 끝까지 걸어가는 동안에는 물론이고, 파리 시내를 몇 바퀴나 돌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결국 에싸위라에서 나의 문장은 비로소 완성이 된 것이다.

이 세상의 첫마디를 낳는 것처럼, 한 번도 사용하지 못한 감각을 드러내는 것처럼, 바스러질 것 같은 연약한 공기 중으로 토해내는 한 모금의 언어. 또 한 모금의 문장. 너는 아득하니 멀어 보였지만, 너의 입김이 고스란히 나의 살결에 닿았다. 돌아온 것도, 돌아간 것도 아니지만 마주한 이 순간을, 너무나 귀하여 감히 어찌하지를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러본다. 다시 들려오는 말 전혀 없다 하더라도, 대답 대신 차가운 적막만이 감돌더라도, 기대했던 따뜻한 미소 한 줌 다시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해야 할 말을 비로소 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순간이다.

에싸위라의 바람은 여전히 거세게 불고 있었다. 파도도 이에 지지 않고 하루의 에너지를 온통 쏟아붓고 있었다. 에싸위라의 풍경에 그저 기대어본다. 함께 했던 지난날들은 더 이상 선명하지 않고, 주고받은 눈빛은 어딘가로 날아갔대도, 우리의 시간은 그 자리에 멈춰 있다. 우리의 언어 또한 그 자리에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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