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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의 지난밤

by 오션뷰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반쯤 눈을 떴다.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뜨겁던 어제는 어디로 갔을까, 낮 동안 타오르던 도시는 조용했고 앞으로 더 이상은 뜨거울 일이 없을 것처럼 고요했다. 거리마다 낮게 소곤대는 소리만이 이 땅의 전부인 듯했다. 툭툭에 몸을 싣고 바람 세수를 했다. 눈곱들이 속눈썹 끝에서 달랑거리는 소리가 더해졌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 또한 차가운 바람에 놀라워했고, 바람이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렇게 20분가량 이동을 했다. 반쯤 떴던 눈 마저, 바람에 못 이겨 계속해서 감은 채로, 꿈에서 불렀던 노래 또한 바람 소리에 종적을 감춘 채로.


신비롭고 오래 묵은 이야기가 많은 것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갔다. 조용히 한 발자국을 내밀고, 몸을 낮춰 그곳의 냄새를 맡아본다. 건조하게 밀려들어오는 찬 바람 사이사이마다 한 밤중에 흘렀음직 한 빗방울이 흐른다. 오래된 이야기는 기억해내지 못하더라도, 오래된 흔적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오래된 것과 낡은 것, 여전히 당당한 것과 또 한 계절을 흘러가는 모습은 감히 아름답다 표현하기에 충분했다.


얼마큼의 계단을 걸었고, 또 얼마만큼의 낮은 담벼락을 건너갔다. 몇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나쳐갔다. 궁금증이 일었던 걸까, 조금 더 외진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슬리퍼가 진흙에 조금 미끄러지는 사이 조금 더 날이 밝아졌다. 눈을 떴을 때만 해도 결코 상상할 수 없던 밝기가 눈 앞에 펼쳐졌다. 목까지 올렸던 겉 옷의 지퍼를 내리고 허리에 둘렀다. 새끼발톱에 묻은 진흙을 쳐다보며 계속해서 걸어갔다. 새벽은 완전히 밝아졌고, 아직 그 벌건 것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마음을 졸이게 하려는 듯 기다림에 못 이겨 주저앉길 바라는 듯, 달궈질 듯 달궈지지 않을 듯, 새빨갛거나 혹은 새파랗거나. 그렇게 뜸을 들이던 하늘은 갑작스럽게 해를 토해냈다. 앙코르 와트의 틈 사이로 하늘이 뱉은 해의 조각이 비쳤다.


여기저기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일어났고, 대부분은 조그마한 탄성이 전부였다. 와아- 놓칠 수 없는 장면에 감히 준비해 온 카메라 셔터를 누를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한 탄성들. 고민들은 모두 지나간 것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리는 시간, 누적된 불화는 그 뜨거움에 못 이겨 스르르 녹아내리는 시간, 오래 묵은 욕망들은 해를 닮아 더 뜨겁게 불타오르는 그런 시간. 해는 속도를 내어 앙코르 와트의 등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조금 더 온전히 보고자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온전히 떠오른 앙코르 와트의 해가 아니었다.


간 밤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얼마나 신비로운 감정이 그들에게 몰아친 걸까? 그들이 남긴 이야기는 지금 여기 어디에 남겨졌을까? 아름다운 보랏빛 천을 두르고 누워있던 두 사람. 바닥은 차가웠고, 해는 뜨거웠고, 대기는 그 사이의 온도를 어정쩡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바람은 그 모두를 휘감았고,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다시 바닥 전체를, 그리고 그들을 부드럽게 감싸기 시작했다. 새벽의 나지막한 고요가 끝나가고 있음을 눈치라도 챈 것인지, 둘 중 머리가 조금 더 짧은 이가 몸을 뒤척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조금 더 긴 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했다.


눈길을 그대로 두어도 되는 걸까? 저들이 갑자기 눈을 뜨기라도 하면 어쩌지?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내가 마치 지난밤 내내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고 생각이라도 하면 어쩌지? 나는 그저 떠오르는 오늘의 해를 마주하러 온 것뿐인데, 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고 여기면 어쩌지? 그러면서도 멈춰 있는 발길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누가 쌓아 올렸는지 모를 오래된 것 안에서, 어디로 흘러가 버린 것인지 모를 지난밤 별의 개수를 세어보며, 또 하루 밤을 견뎌낸 이 작은 사람들. 그들 위로 뜨거운 해가 내리쬐기 시작했다. 머리가 조금 더 긴 이의 머리카락이 더욱 짙어 보였고, 반짝거렸다. 밤새 이 위로 떠올랐을 반짝이던 별을 담은 까닭일까. 머리가 조금 더 짧은 이가 오래도록 바라보며 쓸어내려주던 까닭일까. 이 오래된 앙코르 와트보다 그들은 조금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단 하룻밤만이 허락한 짧은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오래된 것 안에서 온갖 언어를, 온갖 감정을, 온갖 몸짓을 나눈 그들의 그 순간만큼은 오래된 것만큼이나 농익어 그곳에 충분히 새겨졌으리라.



처음으로 우리 살결이 닿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득하니 주위의 모든 것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또 모든 감각이 생애 첫 이름을 부여받아 생생해져 갔다. 아무런 형체가 없던 것들에게 저마다의 모양이 생겼고, 그것은 점차 또렷해져 갔다. 모든 것에 색이 입혀졌고, 저마다 같은 색을 가진 것 하나 없었다. 서로의 살결이 맞닿았고 그것은 굉장히 작은 점에서 시작하여 온 면적을 뒤덮기에 이르렀다. 그것의 속도는 매우 천천히, 하지만 차마 눈을 뜨고 집중해서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속도는 감히 아니었다. 느리지 않게, 천천히 하지만 마치 속도란 것에 처음으로 반응하듯이 그렇게 미끄러져갔다. 서로의 살결은 꼭 붙었다가 이내 떨어졌다가 이내 반복하다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혀가 닿을 수 없던 모든 구석구석으로 우리의 살결이 닿았다. 빈틈없이 따뜻한 공기가 우리의 살결을 애워쌓다.


그것은 마치 보랏빛 차 맛이었다. 알 수 없는 이름의 차를 한 잔 앞에 두고, 새로운 경험을 해보려던 찰나였다. 혀의 감각을 잃을 수도 있고, 한 동안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겁을 먹었고, 그동안에 보랏빛 차는 식어갔다. 본래의 맛이 우러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입술을 대어보았다. 입술과 혀 끝, 이의 사이마다 보랏빛이 물들어갔다. 손톱 밑에 생의 흔적이 남듯이 그렇게 나에겐 보랏빛이 깔렸다. 그렇게 보랏빛이 된 나의 살결에 닿은 너의 살결은 난생처음 보는 색이었고, 그렇게 우리는 본래의 색을 용감하게 잃어갔다. 뜨거웠던 한낮의 해는 졌지만, 마지막까지 해가 남겨준 그 보라색으로 우리는 밤을 지새웠고, 또 아침을 맞았다. 다시 하루의 해가 보랏빛을 잔뜩 머금고 새로운 붉음을 토해내기 전까지. 우리는 굉장한 보랏빛이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용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서로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다시는 오지 않을 그 순간에, 이미 지난번 여러 차례 잃어보았던 서로인 것처럼, 너무나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려 얻은 순간인 것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깨끗한 머리와 마음으로 서로에게서 자양분을 받아 무럭무럭 자라날 것처럼, 하지만 이내 결국 꽃잎 하나 남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은 애초에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것처럼. 그렇게 서로가 가진 모든 살결을 맞대어보고 또 맞대어보았다. 본 적 없던 새로운 모양의 거품들로 가득 매워지는 공간에 우리는 함께 였고, 서로 뿐이었다. 오래된 것 안에 갇혀도 좋고,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서로를 제외한 모든 풍경은 이미 각자가 누릴 것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우리는 그렇게 닿아 있었고 우리는 또 서로 멈춰 있었다.

앙코르 와트의 새벽은 어느덧 시야를 흐리고 있었고, 완벽한 아침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밤 사이 더욱 강렬했던 보랏빛은 자취를 감췄고, 사라진 방향을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서로는 실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아침을 맞이했다. 관광객들의 발길이 분주해지기 시작했고, 서로는 덮고 있던 지난밤을 벗고 대신 뜨거운 해를 입기 시작했다. 지난밤의 조각을 찾는 대신, 꿈이라는 단어를 떠올렸고, 상대의 이름을 불러보는 대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손을 내밀어 보았다.
지금껏 보지 못했던 광경은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에 충분했고, 완벽하지 않아 서로에게 더욱 빛날 수 있었고, 지금껏 감히 꿈꿔보지 못했던 영역의 새로운 무언가를 몰래 간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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