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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등

by 오션뷰

그는 키가 크고 삐쩍 마른 몸매의 남자였다. 자주 그러진 않았지만 그가 꽤나 몸에 맞게 피트 되는 복장을 하고 나타날 때마다 그가 얼마나 말랐는지를 새삼 깨닫곤 했다. 그런 그가 걸을 때마다 마치 그의 골반 언저리에서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아서 난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의 걷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아마도 가뜩이나 마른 몸에, 그의 등이 곧지 못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등은 언제나 굽어 있었다. 어깨는 살짝 몸 안쪽으로 구부려져 있었고, 내가 그의 허리를 꼿꼿이 세워주려 할 때마다 그는 낮은 신음 소리를 내며 손사래를 치곤 했다. 난 그에게 그의 등허리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종종 물어보곤 했다. 그는 그럴 때마다 그저 웃으며, ‘이 등이 나야’라고 심심하게 대꾸하곤 했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맥주 서너 병을 앞에 두고 내게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그는 매우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살면서 죽도록 사랑한 사람, 그래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구나 싶어, 나도 새로운 맥주병을 앞에 가져다 놓고 마시기 시작했다. 삐쩍 마른 그의 몸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것도 내게는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메마른 그의 몸은 가끔 그가 모든 감정마저 소비한 사람처럼 보이게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내가 사랑했던 그녀는, 글쎄 사랑한다는 말로는 너무 부족할지도 모르겠어. 나도 그녀를 향한 그때의 내 마음을 떠올릴 때면 아직도 종종 저 멀리서만 빛나는 오로라가 내게 찾아와서 내 온몸을 휘감아 그때의 우리에게로 다시 데려다주는 그런 기분이니까. 그녀를 위해서 나의 많은 것을 줄 수 있었고, 또 나의 모든 것을 그녀에게 할 수 있는 만큼 주려고 했어.

그는 사랑이 깊어가는 만큼 그의 많은 곳에 그녀를 새기길 좋아했고, 그녀 역시 그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에 행복해했다고 한다. 함께 시작하는 아침은 언제나 갓 구워낸 식빵처럼 보드라웠고, 매일 밤 함께 그려낸 하루의 모습을 되새겨보며, 내일도 또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음에 그 자체로 많이도 설레었다고 한다. 그의 설렘엔 지침이 없었다고 한다. 지치지 않는 설렘을 직접 표현하기 위해 그는 그녀를 할 수 있는 한 많이 안아주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의 품 안에서 먹고, 자고, 키스를 나누었다고 한다. 관계를 가질 때에도 그녀의 작은 몸을 그의 품에 꼭 맞게 안아주면 그와 그녀가 각자 하나씩 가지고 있는 모든 공통된 것들이 진하게 맞닿았다고 하는데, 그럴 때면 늘 둘은 곧바로 절정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부분은 특히나 그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는데, 그것은 그저 그의 앞에 맥주병이 새로 한 병 더 늘어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가 그를 떠나던 날 그는 그녀를 보낼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한때는 그녀의 모든 것을 맡겼던 그의 품을 뒤로 하고, 그녀는 등을 돌렸다고 한다. 그는 그녀의 등을 안고 그녀를 잡을 수 있을 만큼 잡고 있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있는 힘껏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우주의 모든 것인 마냥 끌어안은 채로, 그는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을 또 그렇게 보냈다고 한다. 한 달이 지나자, 그가 품에 꼭 끌어안고 있는 것은 더 이상 그녀가 아님을 알아차렸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쉽사리 그가 안고 있는 그녀라는 허공을 놓을 수 없어서, 그래서 그는 일 년을 더 그렇게 그녀 아닌 그녀를 안고 있었다고 한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하고 적절한 온도로, 그렇게 그녀를 안고 있었다고 한다.

“아 그 때부터, 그녀가 떠나던 날부터 내 등이 이렇게 굽어지게 된 거야. 볼품없지, 나도 알아. 그런데 늘, 그녀를 품에 안느라 등이 살짝 굽어 보이는 것뿐이야.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거나, 그게 아니면 그녀가 내게 다시 돌아온다면, 그사이에 잃어버리고 찢어지고 아팠던 시간은 모두 생략시키고 그녀를 바로 품에 안을 수 있잖아. 이렇게 몸이 기억하고 있잖아, 그녀를.”


마지막 문장을 끝내기까지 그는 맥주 한 병이 새로 더 필요했고, 그가 새로운 맥주병의 뚜껑을 열자마자 병 속으로 그의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나는 애써 모른척했다. 그의 눈물은 그의 외형만큼이나 메말라있었는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속에서만 끙끙 앓고 앓다가 비로소 세상 밖으로 떨궈진 모양새였다.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이제는 그의 등을 굽어 안을 그녀가 곁에 없다는 것을, 그의 말로 직접 내뱉을 후에야 그것이 비로소 사실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은 듯했다. 그의 앞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함께 맥주를 마시는 것, 그러다 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의 굽은 등을 나직이 쓰다듬어 주는 것, 그의 굽은 등에서 메마른 눈물이 흐를 때마다 몰래 그 눈물 닦아주는 것,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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