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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을 마시다

by 오션뷰

우리는 함께 차를 자주 마셨다. 이 작은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이라곤 많지 않았기에, 우리는 어슬렁거리다 만나면 약속이나 한 듯, 너무도 당연하게 찻집으로 갔다. 사실 찻집이라고 해봤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 살짝 벗어난 코너에 의자와 테이블 몇 개 모아놓은 것이 다였다. 바람이 많이 부는 곳으로 명성이 높은 탓에, 찻집이라는 표기로 투명한 비닐로 테두리를 감싸 놓았다. 테이블에 앉으면 찻집 주인은 우리를 알아보고 당연스레 늘 즐겨마시는 민트 티를 한 주전자 내어주었다. 고양이들이 슬금슬금 지나다니고, 하늘에는 갈매기들이 꺼억꺼억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별 일 없는 따분함을 차 한 잔으로 달래기 딱 좋은 그런 날들이었다.


우리는 잔 하나씩을 앞에 두고 차를 따라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를 마시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기도 했고, 함께 지난 간밤에 새로 듣게 된 노래들을 들려주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가사를 찾아서 보며 함께 따라 부르기도 했고, 아름다운 배경이 담긴 뮤직비디오를 보며 그곳은 과연 어디 일지를 궁금해하기도 했다. 그러다 두 번째, 세 번째 잔을 마실 때면 우리는 말 수가 적어졌다. 조용히 각자의 잔을 홀짝이며 광장 너머의 바다로 시선을 두었다.


“D, 나는 이 차가 굉장히 맛있어서 하루에도 몇 잔씩 먹게 되었잖아, 그중 절반은 너랑 마시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D, 난 네가 차를 끝까지 다 마신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지금처럼 이렇게, 늘 어느 정도를 남겨두는 것 같아. 술은 그렇게 끝까지 탈탈 털어마시면서 차는 꼭 안 그러더라?”
오늘도 D의 잔에 5분의 1 쯤 남은 차가 연하게 출렁거리는 것을 보며 내가 물었다. D도 그것을 인정했다. 하루에 최소 다섯 번을 마실 정도로 차를 찾지만, 차를 다 마신 기억이 없다고 했다.


“이상하게도 차를 마실 때면, 생각이 많아진단 말이야. 지난 생각들. 이렇게 한 주전자씩 누군가와 나눠 마시다 보면 거의 오늘처럼 이렇게 3잔씩은 마시게 되잖아, 첫 잔은 갈증을 채워주고 상대방과 이야기하면서 목을 축여. 두 번째 잔부터는 오늘과 어제를 생각하고, 세 번째에서는 지난 기억들 말이야. 그리운 그런 것들이 떠올라. 세 번째 잔에는 이 민트 이파리들이 굉장히 퍼져 보이잖아? 그러면 나도 모르겠어, 그리운 것들이 내 안에 퍼지는 것 같아. 마시면서 음미하는 거야. 내가 만든 추억들, 나의 인생의 일부를 지휘했던 어떤 사람을, 내 생의 어느 한 토막 전체를 내어줘도 아깝지 않았던 사람을, 함께 만든 시간들. 그런데 차를 다 마시면 말이야 끝까지, 그 기억들까지 같이 삼켜지게 될 것만 같아. 솔직히 무서워. 그리 많은 기억을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매일 같이 차를 마시며 그것들을 떠올려. 그러다가 마지막 한 모금하고 반 정도가 남아있으면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자, 가 되는 거지.”


D의 말을 천천히 듣다가 내가 물었다. D는 기억하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좋겠다고, 그 기억 속의 누군가는 참 좋겠다고, 이렇게 매일 같이 하루에 여러 번씩 자신을 떠올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위안일지 모르겠다며, 그 누군가는 그 사실을 모르겠지만 참 좋겠다고 말했다. 이제는 식어버린 찻잔을 쓰다듬는 그의 모습이 지난 시절을 쓰다듬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D에게 멋지다고 이야기해주었고, D는 대답했다.


“누군가는 그러더라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고. 이미 지난 시간들은 어찌 해도 그 시간으로 남아 있을 텐데, 지금의 시간을 써가면서까지 지난 시간들을 추억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더라고. 떠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앞으로의 시간에 충실해서 더 기억할 순간들을 많이 만드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지난 시간들은 내가 지금 이렇게 떠올려야지 다시 빛을 받을 수 있거든? 지나고 나면 아주 아주 캄캄해져서 앞이 분간이 안될 정도로 어두운 곳이 된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이렇게 차를 마시면서 떠올리면, 그 어두운 곳에 불이 켜져, 어떤 날은 은은한 주홍빛이 켜지고 또 어떤 날은 아주 눈부신 조명이 들어서는 거야. 때로는 내가 기억을 해도 잘 떠올려지지 않을 때도 있어. 그때는 나도 보이지 않는 앞을 손으로 더듬거리면서 그때를 생각해보는 거지. 같은 기억이라고 해도 매일이 같지 않고, 또 매일이 황홀하거나 꿈꾸는 것 같지는 않거든. 그래서 떠올리는 기억이 아프면 차 맛이 쓰게 느껴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번진다면 차 맛이 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우리는 그 뒤로도 매일같이 차를 마셨다. D는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본인만의 티타임을 누렸고,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작은 마을의 풍경을, 민트 티의 맛을 온몸으로 느꼈다. 계절은 아주 느리게 변하고 있었다. 반팔을 입고 처음으로 함께 차를 마셨던 우리는 어느덧 두꺼운 후드티를 입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함께 차를 마셨다. 한낮의 해는 여전히 뜨거웠지만, 계절이 지나가면서 발이 시려 더 이상은 슬리퍼만 신고 다니기는 힘든 날씨가 되었다. 그래도 민트 티는 여전히 따뜻했고, 우리가 찾는 찻집은 바람이 들어오는 틈새를 막고자 여기저기 애쓴 흔적이 보였다. 광장 너머 들려오는 파도소리에 맞춰 그에 어울리는 노래를 찾아 불렀고, 또 각자의 침묵을 존중했다. 애써 모른채하던 그리움들을 슬그머니 꺼내보았고, 작은 마을의 바람에 잘 말려보았다.


새해를 맞이하기 일주일 전, 나는 작은 마을을 떠났다. 발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내게는 또 가야 할 곳들이 남아있었다. 작은 마을을 떠난 지 두 달쯤 되었을까. D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고, 거기에는 우리가 그토록 매일같이 마시던 민트 티 사진이 있었다. 볼품없는 찻집의 빨간 테이블 위에 올려진 민트 티가 가득 담긴 주전자, 그리고 그 앞에 놓인 D의 잔. 맑은 날인지, 민트 티 또한 너무나 맑았다. D는 그 사진과 함께 짤막한 문장을 보탰다.
“3번째 잔을 마시고 있어. 우리가 함께 여기서 불렀던 노래들을 생각해.”


그 날은 나도 맑게 우려낸 민트티를 한 잔 마셨다. 서로에게 기억으로 남은 사실이 뭉클했다. 기쁜 것이라기보다는 애틋했고, 아련하다기보다는 그립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D와 함께 한 그 일상적이고도 특별했던 순간들을 마시다 두 모금 정도를 남기고 D에게 사진을 찍어 보냈다. 그리고 나도 한 문장을 보태었다.
“오늘 떠올린 우리의 지난날은 밝았고 따뜻했어. 여전히 추억할 거리는 남겨두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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