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은 지금까지 내게 들려왔던, 거의 다 한 번씩은 들어봄 직한 그저 평범하기 짝이 없던 이름들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당신이 처음으로 내게 당신의 이름을 말해줄 때, 당신의 이름은 당신의 입술 위에서 흘러 내 귀까지, 내 심장까지 차분하게 흘러 들어왔습니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발음해보곤 할 때마다 목구멍에서부터 입술까지 간지러운 뜨거운 것이 올라오곤 했는데, 당신 앞에서 직접 당신을 부를 때면 그 간지러움을 참느라 홀로 많이 애쓰곤 했습니다. 내가 당신을 만났던 그날은 우기(雨期)의 시작을 알리듯 비가 난데없이 쏟아지던 날이었고, 내가 당신을 만났던 그곳은 내가 막 정을 붙이기 시작한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대중교통을 네 번 바꿔가며 도착한 곳이었습니다.
매우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내가 영감을 얻은 것은. 그리고 누군가가 ‘영감을 준’이라는 표현을 내뱉은 것은. 거센 비를 잠시 피할 요량으로 들어간 곳에서 만난 당신과 난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거기엔 내가 잘 모르는 이야기, 전혀 관심을 가져보지 못한 이야기, 눈길을 주지 않던 이야기들도 있었고 너무나도 잘 알지만 당신에게 왠지 모르게 쉽사리 아는 척할 수 없던 이야기들도 있었습니다. 내 귀는 당신이 흘려보내는 목소리를 계속해서 좇아가느라 바빴지만, 사실 나의 온갖 관심은 나의 시신경에 바싹 붙어, 내 눈에 비친 당신이라는 피사체에 오로지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동자와 나의 눈동자가 마주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동자들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모든 날 것을 대변했으며 계속해서 허공에서 부딪히길 바랐습니다. 서로의 술기운이 오르길, 그래서 누구 하나 먼저 용기 내 조금 더 가까운 거리를 만들길 바라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우린 이미 지난 실수와 후회들이 너무 쌓여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꼬박 다섯 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서 마시고 이야기하고, 서로를 보았습니다. 모든 이가 떠나고 덩그러니 우리 둘이 남겨졌을 때에서야, 우리는 얼만큼의 시간을 나누었는지를 셈할 수 있었고 그 사이에 화장실 한번 가지 않았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우릴 향해서만 흐르던 그 날의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맞이하였습니다. 순간이 중요했고, 당신이 나의 그 순간에 너무나 크게 들어와 버렸고, 우리는 너무나 명백하게 순간을 함께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게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다고 했고, 나는 흔쾌히 당신을 따라나섰습니다. 아침의 일출을 보고자 했던 계획이 알아 달라고 칭얼대는 것을 잠시 모르는 척 미뤄두었습니다.
그날 밤은 유난히도 어두웠습니다. 모든 것이 새까만 어둠에 둘러싸인 채, 은은하게 제 역할을 다 하고 있었습니다. 새까만 밤 속, 유독 당신의 눈빛은 눈에 띄게 빛났고 그것은 따뜻하게 나를 데워주었습니다. 당신은 우기(雨期)가 시작되면 마치 호수처럼 변한다는 어느 한 곳으로 나를 데려다주었습니다. 하루 내 하늘에서부터 흐른 물이 잔뜩 모인, 호수를 닮은 그곳은 까만 밤 속에서 얕은 밤바람을 따라 철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나에게 내가 자주 듣는 음악 몇 곡을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내가 좋아하는 9곡의 노래를 들려주었고, 그 9곡의 노래를 들으며 우리는 40분 동안 밤의 드라이브를 계속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난히도 속도를 늦추며 운전하였습니다. 당신도 나처럼, 까만 밤 속 우리가 흘려보내는 시간의 속도를 눈치챘던 것일까요? 우리가 나눈 음악, 그 시간에 흘러간 우리의 음악, 당신은 나의 가장 아끼는 음악들에 귀 기울여주고, 리듬 맞춰주었습니다. 하루 내 거센 비를 받아 낸 작은 도시의 공기는 잠들어 있었고, 아직 깨어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고, 나는 당신과 함께 서늘한 밤공기를 타고 한 가지의 호흡을 나누었습니다.
몇 시간 후, 날이 밝아오기 시작할 즈음 나는 보고 싶었던 일출을 볼 수 없었습니다. 늦잠을 자서는 아니었습니다. 전 날 비를 퍼부었던 비구름이 아직도 남아, 수평선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당신과 다섯 시간 동안 이야기했던 곳으로 가서 카푸치노를 한 잔 마셨습니다. 행여나 당신을 다시 한번 더 볼 수 있을까 기대도 했고, 한편으론 까만 밤에 빛나던 당신의 눈동자가 아침이라는 시간에 가려져 행여나 당신의 눈동자를 찾지 못할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어쩌면 몇 시간 전, 나는 이 작은 도시에서 단지 아득한 꿈 하나를 꾼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얼핏 들었습니다. 당신으로 기억될 그 작은 도시를 떠나는 길에 난 당신에게 들려주었던 9곡의 노래를 들었습니다. 입 속엔 아직 카푸치노 향이 연하게 남아있었고, 눈가엔 당신이 보여주었던 호수를 닮은 커다랗고 까맣던 물이 아직도 촉촉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빛나는 까만 물의 표면에 비칠 당신의 모습을 찾으려 애쓰며, 홀로 당신의 이름을 꽤나 여러 번 불러보며, 그렇게 나는 길을 돌아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