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가장한 필연
어쩌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러한 것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고 당연하게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그저 꽁꽁 숨어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척, 보지 못한 것은 단지 ‘나’였다고 은연중에 흘리는 것 같다. 내 것일지도 모른다고 잔뜩 기대감에 부풀게 한 것들은 결국 나중엔 기억도 제대로 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내 것일지도 모를 그것에 따라 사소하게 움직인 내 감정이 지나고 나면 참 부질없게 조각난다.
이제 나에게 남은 것은 신축 빌라였다. 지나가면서 그 신축 빌라를 살짝 들렀다. 곡성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형태의, 뭐랄까 멋을 좀 낸 외관이었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특별함이 뿜어져 나온다고 해야 할까. 공사가 한창인 내부에 조심스레 들어갔다. 2층 가장 안쪽의 집을 들어가 보았다.
와아-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거실에 커다랗게 뚫린 공간을 향해 바깥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왔다. 이곳에 통창이 달리리라. 그리고 그 너머로 테라스가 있었다. 꿈의 테라스! 언제나 테라스가 딸린 집에 살고 싶어 했다. 베란다 말고 테라스 말이다. 아침이면 햇빛을 받으며 한 손으로는 눈곱을 떼고 다른 한 손으로 갓 내린 따뜻하고 진한 커피를 들고 있을 테지. 나만의 편한 의자에 앉아 그 아침 감성을 끄적이거나 전날 쓰지 못한 일기를 쓸 수도 있겠다. 지역에서 나는 싱싱한 과일도 함께 먹으며 테라스에서 아침 스트레칭까지 마치는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지 나는 그 신축 빌라에 꼭 살아야겠다고, 아니 내가 곡성으로 노선을 튼 이유는 바로 이 집에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라고 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 방이 너무 좁은데? 억지로 0.5 룸 하나 더 만들어놓은 거네. 화장실도 너무 비좁은 수준이고.”
하지만 나에겐 그런 말이 들릴 리가 없었다. 오히려 나의 드림하우스를 왜 비난하는지 화가 날 지경이었다.
“저 테라스를 보라고! 게임 끝이야. 난 무조건 이 집에 살고 싶어.”
하지만 그 집 테라스는 내 것이 될락 말락, 나와 밀당을 계속했다. 대기 1번인 나는 그 건물 분양을 맡고 있는 부동산에게 지인 찬스를 써서 어떻게 좀 미리 입주 가능 여부라도 알 수 있을까 했지만 얄짤없었다. 그저 조금만 기다려보라고, 공사가 조금 늦어지고 있다고, 아마 대기 1번이니 가능성이 있긴 한데 정확하게는 조금 더 기다려달라는 대답뿐이었다. 나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나의 드림 테라스는 점점 희미해져만 갔다.
마냥 드림 하우스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득 없이 교차로만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겠다 싶을 때. 그때 우연히 나는 전화 한 통을 걸게 된다. 곡성에서 가장 오래된 빌라, 그러니까 가장 먼저 생겨서 아직까지 잘 버티고 있는 빌라의 건물주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다. 그 앞을 지나가다 건물에 붙은 전화번호를 보았고, 사실 별 기대는 안 하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전화를 한 것이었다.
“혹시 빈방이 있는지 해서 전화드렸습니다.”
“ㅇㅇ부동산으로 전화해 보세요.”
어라? 그렇다면, 이건 그린라이트?! 나는 바로 그 부동산으로 전화를 걸었고, 그 통화에서 나는 참 소득을 건졌다. 그 오래된 빌라의 원룸뿐만 아니라 또 다른 신축 빌라의 1.5룸짜리 집도 매물이 있다고 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지만 신축이라니까 괜히 설렜다. 혹시 테라스가 있을까? 하는 상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다.
오래된 빌라는 들어서자마자 한기가 돌았다. 바로 나는 인상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건물을 나설 때까지 인상을 펼 수 없었다. 입주 가능한 그 방은 도배도 새로 필요했고, 창문 너머로는 무성하게 꼬인 전깃줄이 보였다. 무엇보다도 북향이었다. 북향은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넘어간 신축 빌라. 2년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건물이 참 깔끔했다. 4층 짜리 건물에 엘리베이터도 있었고, 엘리베이터 안에는 공기 청정기능이 활발히 작동 중이었다. 건물 보안도 잘 되어있었다. 마음에 들었다. 이제 집만 마음에 들면 된다.
그런데 집주인이 집을 아직 보여줄 수가 없다고 해서 대신 다른 집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입주 가능한 집은 1.5룸인데 내가 본 집은 원룸이었다. 창문이 난 방향도 다르고, 부엌의 구조도 달랐다. 생각보다 크게 빠진 원룸이었지만 선뜻 마음이 가지는 않았다. 부동산 사장님이 그려줘 가면서 구조를 설명해 줬지만 그리 크게 와닿지가 않았다.
“그래도 집을 좀 봐야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풀이 죽은 나는 굶주린 맹수 앞에 선 아주 작은 먹잇감이 된 것만 같았다.
“여기는 그냥 나왔다 하면 바로 빠져요. 아직은 소문이 안 났어. 아가씨가 어떻게 먼저 전화를 준 거고. 여긴 안 보고 바로 해도 돼. 내가 보장한다니까!”
그의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읍내의 이런 신축 빌라는 당시 (2월) 잘 나오지도 않을뿐더러, 나온다 해도 다들 쉬쉬하며 지인에게만 알려 바로바로 낚아채가는 형식이었다. 내가 이 신축빌라에 빈집이 생길 거란 소식을 알게 된 건 그러니깐 참 놀라운 우연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실제 집을 보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어차피 결국 보여줄 거, 왜 집을 바로 보여주지 않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세입자가 언제든 집을 보여줄 의무는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계약금 50만 원을 내지 않으면 이 소문은 곧 퍼질 것이고, 나는 기막힌 우연을 시시한 해프닝으로 바꾸게 될 처지였다.
나는 사장님에게 한 시간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곤 친언니에게 에스오에스를 청했다. 언니가 무언가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나의 예상이 맞았다.
“그럼 계약금 50만 원 중에 반만 내고, 나중에 집 볼 수 있을 때까지 아무에게도 소문내지 말고 기다려달라고 해! 그러면 부동산에서도 남는 장사야. 아쉬울 게 없지.”
맞았다. 부동산에서도 흔쾌히 응했고, 나는 계약금 절반과 소문내지 않는 조건을 맞바꿨다. 그 사이에 드림 테라스 집을 입주할 수 있게 된다면 절반의 계약금 따위 아까워하지 않으며 (는 사실이 아니었지만) 테라스 집으로 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나름 시간을 번 것 같았고, 의미 있는 거래에 만족해했다.
일주일은 빠르고도 느리게 지나갔다. 기다리는 전화는 오지 않았다. 피가 말렸지만 보험과도 같은 집이 있으니까 요동칠 만큼 불안하지는 않았다. 일주일이 되어 절반의 계약금을 낸 집을 보러 가는 날이 되었다. 세입자가 퇴근하고 난 뒤인 6시 이후에 오라고 했다. 일조량을 보려면 낮에 가야 하는데, 그래도 동남향이니까 나쁘지 않겠다 생각했다. 그날 오후 나는 마지막으로 드림 테라스 분양 담당 부동산에 전화했지만, 역시나 내가 원하는 답은 듣지 못했다. 여전히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 맛있는 걸 앞에 두고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 훈련견이 된 기분이었다. 침이 뚝뚝 떨어지지만 침을 닦을 무언가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집을 보러 가기 전에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을 쉬기가 쉽지 않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숨이 턱 막혀서는 온갖 감정이 와르르 솟았다가 후드득 부서졌다. 진짜 곡성에 집을 구하는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동안 집을 구하고자 애썼던 모습, 아니 그보다 여기서 살아야겠다고 결심하던 순간, 그보다 더 전에 어쩌다 여기로 흘러들어오게 된 그 모든 과정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새로운 시작이 코앞에 있었다. 그 시작은 내게 빨리 들어오라고 손짓하기는커녕, 무관심한 모습으로 심드렁하게 날 맞이했다. 떨렸다. 어쩌면 그냥 단순하게 ‘떨렸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온몸이 떨렸고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구토 증상이 느껴지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드디어 그 베일에 싸인 집을 보게 되었다. 미닫이 문 두 개로 작은 베란다와 방, 주방이 분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았고, 억지로 원룸을 1.5룸으로 늘려 월세를 많이 받으려는 속셈 같았다. 조금은 답답한 감이 있었지만, 집 안이 전체적으로 깔끔했다. 세입자가 짐이 너무 많아서 산만했지만, 그 점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충분히 반듯한 외관에 깔끔한 집 상태였다.
“미닫이 문이 양옆으로 있어서 방에 있으면 겨울에는 따뜻해요. 대신 여름에는 좀 많이 더워요. 그래도 에어컨 켜고 있으면 괜찮아요. 화장실도 창문 열어놓으면 습기도 잘 빠지는 편이고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추운 집이었다면 반쪽짜리 계약금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역시 살아본 사람의 생생한 증언은 중요하다. 내가 추위는 못 참아도 더위에는 강한 편이라 다행이었다.
마음이 백 퍼센트 동하지는 않았지만 결정을 해야 할 때였다. 그래, 테라스 집은 내 집이 아닌 것이고, 시기적절하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나타난 이 집이 내 집이겠거니- 결정은 미뤄봤자 답답함만 커질 것이다. 조마조마함의 껍질을 벗고 이제는 구체적으로 내 집을 그려나갈 차례였다.
“좋아요. 계약할게요.”
심장은 계속해서 마구 뛰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제 계약서를 쓰고 입주일을 정하고 하는 등등의 것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때였다. 그래도 일단 집을 구했다는 것에 스스로가 대견했다. 그날은 그랬다. 충분히 나 자신을 칭찬해도 되었고, 그동안 맘 졸였던 것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어도 되었다. 진짜로 내 집이 생긴 것, 그러니까 시골에서 집 구하기에 성공한 것이었다.
며칠 뒤 드림 테라스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다. 앞에 분양을 포기한 사람이 있어서 내가 입주할 수 있다는 연락이었다. 대기 1번의 위엄이었다. 그 연락을 받았을 때 아쉬웠냐고? 전혀. 이렇게 타이밍이 안 맞아서야, 내 집이 되어도 문제가 많을 것이 분명했다. 아름답게 그렸던 테라스는 좁디좁은 방의 그늘로 가려졌다. 나는 이제 내 집이 될 그 방을 열심히 곱씹었다. 드림 테라스보다 훨씬 멋졌다. 확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