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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간 미뤄둔 아픔

퇴사하고 나서야 아플 수 있었다

by 허군

퇴사를 하고 나서 매일 아침,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대략 2주 정도는 그렇게 회사가 아닌 병원으로 출근을 한것 같다. 내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한의원까지. 감기처럼 가벼운 증상이 시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낫질 않았다. 목감기는 점점 심해져서 음식을 먹기 힘들어지고, 발바닥은 이유도 없이 욱신거렸다. 어쩌다 다친 손등 인대는 아직도 힘을 주면 뻐근하게 신호를 보낸다. 약을 먹고, 잠을 충분히 자고, 밥도 제때 챙겨 먹었는데 몸은 전혀 회복될 기미가 없었다.


이상했다.


예전 같으면 감기쯤은 약 하나로 넘겼고, 웬만한 통증도 하루이틀 타이레놀을 먹으며 버티면 괜찮아졌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항생제를 2주 넘게 먹어도 목은 나아질 기미가 없고, 발바닥 통증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분명 나는 지금 쉬는 시간도 많아졌고, 마음의 여유도 있는데 왜 이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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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즈음, 오랜 친구가 연락을 줬다. 나보다 먼저 퇴사를 겪은 친구였다. "얼굴 좀 보자"고 했지만, 나는 몇 번이나 몸이 안 좋다는 이유로 약속을 미뤘다. 그러다 세 번째 약속을 취소한 날, 친구가 전화로 말했다.


“야, 너 그거, 13년간 미뤄둔 아픔들이야.”


말문이 막혔다. 뭔가 툭 하고 눌러지듯 울컥했다. 그 말은 너무 단순했지만, 그동안 설명할 수 없었던 내 몸의 이상함을 정확히 짚었다. 생각해보니 13년동안 회사 다닐 땐 마음대로 아플 수도 없었다. 기침이 나도 참고 출근했고, 편두통이 와도 약 하나 삼키고 회의에 들어갔고, 몸살이 나도 "내일까지는 나아야 해"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내 몸한테 단 한 번도 “지금은 아파도 돼”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퇴사를 하고 나서야 내 몸이 비로소 이제 아파도 괜찮다는 신호를 알아차린 걸까. 긴장이 풀리고, 회사일로부터 벗어나고, 하루하루의 리듬이 천천히 흐르기 시작하자 그동안 눌러왔던 아픔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건 고장난 게 아니라 회복의 신호라고. 더는 억지로 아픈걸 참지 않아도 된다고. 당분간은 그냥 아프기로 했다. 제대로 아파보고, 제대로 쉬어보기로 했다. 이제서야 퇴사는 일에서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지만, 한때 미뤄뒀던 나를 다시 마주하는 일이라는걸 깨달았다.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자이언티의 노래 한 줄이 오늘따라 더 깊이 가슴에 남는다. 정말 그런 삶을 살고 싶다. 행복하고, 아프지 않고, 무언가에 쫓기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속도를 따라가는 그런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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