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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탄과 절망 사이

내가 만든 공 안에서 빠져나오기

by 나날
누가 나보다 나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 생각인지 감탄하게 되고 동시에 저한테는 절망하지요.


반투명 비치볼 안에 작은 방울이 흔들린다. 공을 통통통 튀기거나 양손으로 잡고 흔들면 방울이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마구 부딪친다. 내 손 안의 작은 공안에서.


요즘 나를 보면 어릴 적 갖고 놀던 그 공이 생각난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벽에 부딪치고 감자기 불쑥 모습을 드러내고 흔들리다가 사라진다. 나는 그 생각들을 잡으려 손을 뻗지만 어느새 흩어지고 의미 없는 상념으로 흘러간다. 그러면서도 계속 그 구름처럼 흩어지는 생각들에 형태를 부여하고 내가 지나쳤던 의미의 옷을 입혀 나 눈앞에 펼쳐놓고 싶어 진다. 언어의 옷을 입혀 글로 펼쳐 놓고 싶은 마음이 자라난다. 어느덧 애걸복걸하게 된다. 더 이상 흩어지면 붙잡지 못할 것만 같아서.


하지만 어렵사리 붙잡은 기억들은 그냥 텅 비어 있는 경우가 많다. 시간이 지나면 의미를 알게 될 거라 흘려보내듯 살아왔지만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 보아도 그곳엔 물음표 혹은 말 줄임표만 남아 있다.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어른이 되지 않는다. 생각보다 몸이 빨리 성장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지나온 많은 순간 나는 비겁했고 언젠간이라는 말로 위로했고 그 언젠가라는 시간을 마주하자 또다시 도망갈 곳을 찾고 있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장면들이 흘러가고 그 기억들에 내가 줄 수 있는 말을 걸어놓는다. 거기에 남는 건 절망이다. 내가 지어 올린 옷은 너무도 남루하고 낡고 심지어 색도 살짝 바랜 듯 보인다. 어디에도 내놓기 힘들다. 결정적으로 그건 나만 알아보는 옷이 되어버린다. 누구에게도 입힐 수 없는 옷.


왜 그럴까.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단지 내 기억들에 옷을 입혀 남들도 그 옷을 입고 각자의 거울에 비춰보길 원했을 뿐인데 정작 내가 만들어낸 옷은 나 아니면 아무도 입을 수 없어 보인다. 그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좌절한다. 답은 거기엔 내가 너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일까. 나는 그 기억의 무늬를 언어를 통하지 않아도, 아주 작은 암시만으로도 따라 길어 올릴 수 있는다. 하지만 타인은 그렇지 못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그 옷을 입히기 위해서는 무늬를 하나하나 선명하게 새겨주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그건 곧 미적 쾌감, 아름다움 일 것이다. 나는 아직 내 안에 있는 걸 얼룩덜룩 기워 겨우 꺼내 놓는 수준이다. 눈앞에 반쯤 드러난 옷을 앞에 두고 절망에 빠진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의 옷은 너무나도 생생하고 누구라도 한 번쯤 입어보고 싶게 반짝이기 때문이다.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렇다. 요즘은 이슬아 작가의 책들을 읽고 있다. 그 속의 목소리에 푹 빠져서 단숨에 일간 이슬아 메일링 서비스도 신청했다. 단순히 잘 읽힌다 재미있다는 수준이 아니라 정말 감탄을 하게 된다. 어떻게 이렇게 쓰지? 수줍음 많은 아이였다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이 없어 보인다. 나만 알고 있는 작은 점, 남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은 어떤 것까지 속 시원히 드러내고 당당하게 '이게 나'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나는 자꾸만 숨고 싶고 어떻게 하면 나를 드러내지 않고 돌려 말할까 궁리하면서도 그 안에 든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란 단순히 자기 경험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의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이슬아 작가는 자신의 글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대로 쓰는 것 같아 보이지만 매번 픽션으로 고쳐 쓰는 작업을 거치며 일기가 아닌 소설로 읽히기를 바란다고.(깨끗한 존경, 이슬아 인터뷰집, 100p 중에서 재인용) 결국 남이 쓴 글을 읽는다는 건 다른 누군가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어떻게 해석하고 소화해서 표현하는지 그의 눈으로 바라보고 느껴보고자 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그걸 벗어나 다른 이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어서, 잠시만이라도 나에게서 벗어나 타인이 되어보고 싶어서 글을 읽는다.

지금껏 내가 읽고 가슴에 새겼던 글들 역시 그랬다는 것을 다시 기억하려 한다.


글을 쓰면서도 스스로 나를 가두는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진실과 거짓, 픽션과 논픽션. 그 사이 어디에서 계속 방황하고 있다. 내가 나를 가둬두고 못 견뎌하고 있다. 결국 온전한 단 하나의 진실이란 건 허구라는 것, 우리 모두에겐 각자가 해석한 진실이 있을 뿐이란 걸 되새기며 나를 조금씩 풀어줘야겠다.

다른 사람의 글을 읽으며 감탄하고 나 자신에게 절망하지만 결국 우리에겐 각자의 길이 있다는 것, 모두 다른 길 위에서 나아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는 것 역시 기억하며.


어릴 적 갖고 놀던 비치볼에 대한 일화가 있다. 내 기억엔 없고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다.


비치볼 안에서 여기저기 튕기는 방울을 쳐다보던 나는 어떤 결심을 한다. 그리고 내가 구할 수 있는 가장 뾰족한 물건을 찾기 시작한다. 그 물건으로 반투명 비치볼을 가른다. 그리고 엄마에게 뿌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엄마, 내가 방울을 구해냈어!


내 생각을 더 뻗어 나게 하지 못하는 그 반투명의 경계가 무엇이든 그걸 가르고 안에 든 방울을 꺼내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음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그 시절 비치볼 안의 방울을 골똘히 쳐다보다 그에게 자유를 주었던 잃어버린 어릴 적 나의 모습이다.


글쓰기는 흔히들 자아표현이라고 하는데 저는 좀 생각이 달라요. 저한테 글쓰기는 자아 형성, 자아 해방, 자아 이동인 듯해요. 누가 나보다 나은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게 얼마나 좋은 생각인지 감탄하게 되고 동시에 저한테는 절망하지요. 감탄과 절망, 이 둘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새로운 내가 만들어지는 듯도 해요. 새로운 세계로 옮겨가는 듯도 하고요. 결국 좋은 책은 유혹이자 권유이고 초대예요. '우리, 이렇게 살자! 우리 저리로 가자!'

이슬아 인터뷰집 깨끗한 존경 중 라디오 PD 정혜윤 인터뷰, 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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