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이유, 나 자신에서 가장 멀리 가보기
타인의 슬픔을 슬픔으로, 타인의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면 그건 영혼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이랬다. 축하와 밥과 술을 듬뿍 나눈 오늘 나는 영혼에 대해 생각하며 혼자 밤을 보낸다. 충만함이 공포를 이긴 밤이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341p
나는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받은 세대다.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정해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걸, 그것의 잔인함의 민낯을 누구도 대놓고 우리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짜인 시스템 속에서 그 규칙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다.
시간이 지나 어느 정도 잊혔지만, 입시는 크고 작은 상처를 남겼다.
겉으로 보이는 우정이란 것이 얼마나 얄팍한지, 성취라고 여겨지는 어떤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과시욕이 얼마나 아름답지 못한 지, 그 사이에서 하지 않아도 될 자책에 빠진 이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무력했는지, 제도 속에서 등급이 매겨진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굴욕적인지.
고등학생의 나는 생각한다.
대학만 가면 누구도 한정된 잣대를 들이대며 줄 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해방과 자유의 탈출구가 거기 있을 것이라고.
대학에 간 나는 깨닫는다.
누군가의 의자를 뺏어야 살아남는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남들보다 조금 늦게 깨달았기에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나는 무지하고 기민하지 못했기에 그 시간들을 나 좋을 대로 색칠하고 허비할 수 있었다. 어쩌면 더 이상 그런 시간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와 똑같은 길을 가서는 승산이 없다고 포기해 버린 것일 수도 있다. 단순히 지쳤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타인의 슬픔을 슬픔으로, 기쁨을 기쁨으로 느끼는 능력을 조금은 내 안에서 끄집어냈다고 믿는다. 마음을 조금 넓혀 영혼이 돌아올 자리를 마련했다고. 그때 내 몸을 통과한 타인의 이야기들이 내가 내 안에 갇히는 것을 막아 줄 수 있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나라는 울타리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나로부터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이다. 그래서 오늘도 읽는다. 그리고 조금씩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