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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 Oct 18. 2021

1인분의 삶

결혼하고 애를 낳아도 1인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서

운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하는 이유와 시기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20 후반 생존을 위해 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를 깎아내지 않고도 사회로 나갈 수 있을까


졸업까지  학기를 남겨두고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라는  시작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이 촉발한 미국발 금융 위기 영향으로 취업 시장이 좋지 않았을 무렵이다. 취업 시장이 좋을 때가 있었나, 그냥 말로만 전해오는 화려한 시절이 아닐까 싶게 취업 시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어렵다. 막상 준비를 하려니 막막했다. 나는 내가  잘하고  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무슨 일이든 잘할  있을  같기도 했고, 어떤 일도 내게 맞지 않을  같기도 했다. 한마디로   자신은 물론, 일이나 업에 대해서도 무지했다.


취업 스터디를 하면서는 더 좌절스러웠다. 기업에서 원하는 스펙을 갖추지도 못했고 그걸 쌓으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게 왜 필요한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잘 모르지만 회사에서 하는 일과 원하는 스펙 사이에 너무도 큰 괴리가 느껴졌다. 가장 낙담했던 건 자기소개서였다. 네, 다섯 개의 문항과 몇 자 내외라는 글자 수가 제시된 빈칸을 보고 있으려니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을 어떻게든 거기에 구겨 넣어야 하는데, 도무지 어디를 접고 어떻게 펼쳐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철 지난 논술 답안을 채워 넣듯 꾸역꾸역 채워보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어떻게 보아도 내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 질문들에 원하는 답이 있을 거란 생각이 나를 답답하게 했다. 스스로 생각하는 나는 모난 구석이 많은데 사회가 원하는 인재상은 그게 아니었다. 결국 나는 그때까지 내 인생을 조목조목 분해해가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할 거란 불안감이 나를 잠식했다. 모나지 않게 나를 깎고 다듬어야 그 틀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도무지 그럴 자신이 없었다. 대학원은 일찌감치 선택지에서 지웠다. 더 공부할 형편도 되지 않았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더 이상 속일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무언가를 할 패기나 비전도 없었다. 암울한 시기였다.


그렇게 준비한 취업이 잘 될 리 없었다. 같이 준비하던 사람들은 하나 둘 척하니 합격 소식을 알려왔다. 결국 졸업을 유예하고 작은 광고 회사에서 인턴을 하던 무렵 정말 우연히 생각지도 못했던 지금 업계에 들어왔다.


업계는 젊었고 조직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유연했다. 대학 내내 운동화만 신고 다니던 내가 취업 준비랍시고 정장에 구두를 신고 면접장에 가야 했을 때, 그때 느꼈던 생경함과 좌절스러움이 아직도 기억난다. “운동화와 구두, 그 사이 어딘가”라는 제목의 긴 일기를 썼던 것도 같다.


내가 우연히 들어온 업계는 억지로 차려입어야 할 필요가 없었다. 열정으로 뭉친 사람들에게서 얻는 에너지도 좋았다. 문제는 내가 이 업계에 너무도 무지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어디를 들어갔어도 그랬을 것이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프로젝트는 너무 좋았지만 그 속에서 내가 너무도 부족한 것 같았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알아서 척척 할 일을 해내는지 신기했다. 주어진 일을 하기에도 바빴지만 난 그들처럼 되고 싶었다. 프로젝트에서 명확히 1인분을 제대로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시 조직은 8시 출근이 원칙이었다. 회사 근처 걸어서 15분 거리로 이사했다. 학교 근처도 월세가 비싼 건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교통비를 더 낸다 생각하고 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나에겐 어마어마하게 큰 금액이었다. 오전 8시까지 출근하고 오후 8시가 훨씬 넘어서야 퇴근했다. 그땐 이 안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해내고 싶다는, 그렇게 해서 내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요즘과 다르게 회식 문화도 있었다. 조직 구성원은 대부분 젊었지만 그렇기에 더 회식도 잦았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


그런 생활을 몇 년 하니 스스로 내 몸이 쓰레기가 되었다고 느꼈다. 딱히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항상 기운이 없고 피곤했다. 내 몫을 잘 해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썼지만 회사 일이란 것이 나 혼자 전력질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할 수 없는 영역의 일까지 신경 쓰며 전전긍긍하다 보니 급기야 5년 차에 번아웃이 찾아왔다. 그렇지만 그 사이클을 벗어날 돌파구를 찾을 수 없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그 무렵 회사가 판교로 옮기면서 사옥이란 것이 생겼다. 사옥에는 사내 식당을 포함해 피트니스 시설을 갖춘 짐 등을 운영했다.


나는 소위 말하는 아침형 인간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가 힘들어하는 건 밤을 새우는 것, 내 의지와 상관없이 해야 할 일들 때문에 늦은 시간에 자야 하는 상황이다. 야근을 밥먹듯이 할 때도 수면 시간만큼은 어떻게든 확보하려고 애썼다. 낮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여 일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쓰러지듯 잠에 빠져드는 일도 흔했다. 판교로 오피스를 옮길 무렵 소속된 프로젝트의 조직원들도 하나 둘 가정을 이루기 시작하며 8시 출근 룰도 변경되었다. 일찍 일어나서 아침에 운동하는 길을 선택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걸어 나가 셔틀을 타고 출근해서 운동을 하고 출근하는 루틴을 짰다. 출근은 어떻게든 하게 되니 출근과 운동이 한 세트로 묶이자 평일에는 거의 매일 운동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러닝머신에서 걷기만 했다. 사람마다 맞는 운동이 있다. 나는 단시간에 스퍼트를 올려하는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루의 시작인 아침에 운동을 하는 만큼 지쳐 녹초가 될 만큼 운동하고 싶지도 않았다. 러닝머신에서 뛰는 대신 빠른 속도로 걷기를 택했다. 숨을 헐떡이지 않고 호흡을 조절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렇게 몇 달을 하고 나자 그룹 엑서사이즈 프로그램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요가/필라테스가 눈에 들어왔다. 예전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도저히 시간을 낼 자신이 없었고 비싼 교습료도 장벽이었다. 다행히 사내에서 운영하는 단체 엑서사이즈 프로그램은 크게 부담이 가지 않는 금액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담당 선생님의 구성에 따라 요가와 필라테스 수업을 모두 들었는데, 둘 다 내게 잘 맞았다. 무엇보다 호흡에 신경을 쓰며 내 몸의 순환과 균형에 집중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 운동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양 발을 넓게 벌리고 서서 뒤로 양팔을 깍지 끼고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인 뒤 팔을 앞뒤로 흔드는 동작을 하는데, 내 몸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가운데로 팔을 앞뒤로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 양 쪽의 밸런스를 맞추는데 초점을 맞췄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며 흉곽을 부풀리고 입으로 천천히 내쉬며 흉곽을 조이는 흉식 호흡도 일상의 긴장을 푸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일하면서 긴장을 하고 집중하는 편이기도 하고 업무의 흐름이 끊기는 걸 싫어하는 편인데 그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짧게나마 리프레시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스트레스가 풀렸다.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근육을 사용하며 몸을 말 그대로 교정해나가는 것도 큰 기쁨이었다. 원래 크게 체중의 변화가 없는 편이었는데, 운동을 하며 체중 자체에 큰 변화는 없었지만 몸의 근육이 살아나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다고 미디어에서 보이는 것처럼 몸짱의 느낌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었지만 앉아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손목이나 허리 등의 질환 없이 나 스스로 가뿐하다는 느낌을 갖고 생활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내 몸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다. 항상 몸에 긴장을 하고 있는 탓인지 학창 시절부터 딱딱하게 굳어있는 승모근은 당연한 것이었다. 필라테스를 하며 코어에 힘이 생겼고 무엇보다 평상시에 수시로 내 자세를 점검하는 습관이 생겼다. 한쪽으로 잡느라 약간 비스듬했던 자세를 교정하기 위해 왼손으로 마우스를 쓰기 시작했다. 몸의 중심을 찾고 힘을 주어 바로 잡아야 할 근육과 이완시키고 풀어줘야 할 근육을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체가 발달한 체형에 콤플렉스가 있었으나 보이는 것보다 내 몸 자체에 집중하니 자연스레 겉으로 보이는 모습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신적으로도 조금 숨을 쉴 틈을 찾을 수 있었다. 나 혼자 해낼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도 그 생각에 짓눌리는 대신, 이 일을 제일 잘할 수 있는 건 나이며 그러기 위해 필요한 건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닥친 일부터 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밖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외적인 것들은 적절하게 포기하고 마음을 내려놓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1인분의 삶, 그 가벼움과 무거움


그때 난 그토록 내가 원하던 1인분의 삶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이 1인분의 삶이란 표현은 <혼자서 완전하게> (2017, 이숙명)라는 책에서 처음 접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며 “더도 덜도 없는 딱 1인분의 삶”을 꾸려나가는 저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내가 꿈꾸던 라이프 스타일과 맞닿아 있었다. 가족에게서 떨어져 나와 낯선 도시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로 내가 꿈꾸었던 것은 내 스스로 온전하게 내 삶을 꾸려가는 것이었다. 나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부딪치며 대학생활을 보냈고 결과적으로 별 소득이 없었지만 경제적인 독립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나 자신을 크게 깎아내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고 내 역할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조직이 주는 안정감과 일에서 얻는 성취감, 내가 나의 삶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나의 삶은 나름 안정적인 기반 아래 놓여 있었다.


다만, 나는 그런 1일분의 삶을 혼자 살아가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맞는 반려자와 함께 하는 삶을 그렸고, 그 안에 아이도 있었다. 내가 1일분의 삶을 온전히 살 수 있다고 느끼고 나서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결혼에 대한 큰 환상이 없었기에, 혼자서 잘 살 수 있어야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말을 믿었기에, 오랜 기간 함께 한 파트너가 있었기에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에 대한 책임감과 막연한 두려움 역시 갖고 있었다. 그 헌신의 무게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막연히 회피하고 싶지 않았다. 제대로 잘 부딪혀 보고 싶었다.


혼자서 완전하게 살 수 있다면, 반려자와 아이와 함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무엇하나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게 헛된 욕심이 되지 않는 세상을 꿈꾼다.


실제로 내가 맞닥뜨려야 했던 현실은 생각보다 참혹했지만 그 안에서 수없이 많은 좌절을 맛보았지만 오늘도 나는 그런 삶을 꿈꾸며 이 글을 쓰고 있다. 가족 구성원 모두 1일분의 삶을 누리며 서로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는 그런 삶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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