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소요서림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책 Jun 08. 2023

우리 모두에게 눈부신 안부를

<눈부신 안부>를 읽고

백수린 소설가의 첫 장편 소설 <눈부신 안부>를 읽었다. 출간 소식을 듣자마자 사전예약으로 받았지만 일상에 치여 바로 읽지 못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읽기 시작했다. 주로 새벽에 일찍 일어나,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며 환한 빛 속에서 읽었다. 다 읽고 난 지금 역시 아침이 밝아오는 빛 속에 가만히 앉아 있다.


이야기를 읽으면서 작가가 펼쳐놓은 마음과 장면들에 흠뻑 빠져 있으면서도 내가 이 작가의 문장과 인물들에 왜 이리 끌리는지 자꾸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발견했다. 키워드는 “다정”과 “빛”이었다. 나에게 없는 무언가를 백수린 소설가의 이야기 속 인물들에게 발견하고 나도 모르게 그들을 닮아가고 싶어 한다는 걸 <눈부신 안부>를 읽으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피한 것이다. 달아난 것이다. 나에게 다가와 마음의 문고리를 잡고 흔드는 우재로부터. 그때 내가 원했던 건 누군가의 삶에 내가 또다시 영향을 미치게 되리라는 그 무시무시한 가능성으로부터 도망치는 것뿐이었으니까.
백수린, <눈부신 안부> 중에서


타인에게 작은 영향을 주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누군가 내 안에 저벅저벅 걸어와 깊숙하게 숨겨놓은 진짜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모순된 마음이 20대 초반 나를 뒤덮고 있었다. 소설 속 주인공처럼 커다란 상실의 아픔을 경험해 본 적은 없었지만, 타인과 지나치게 가까워졌을 때 내가 그들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벽을 치는 회피형 인간이었다. 기본적인 성향은 그대로이지만 시간을 겪으며 나는 조금 달라졌다. '왜 나는 사람들과 어느 선 이상으로 가까워질 수 없을까'를 고민하고 자책하기보다 내 안에 어쩔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받아들였다. 그건 단순히 타인에 대한 신뢰 부족이나 인간에 대한 환멸이 아닌, 내 내면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인정에 가까웠다. 굳이 따지자면 내가 가진 사람의 깊이가 그 정도임을 인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얇지만 소소하게 이어지는 만남들에 그럴듯해 보이는 가장이 아닌 내가 펼쳐 보일 수 있는 진심을 담으면서 적어도 타인이나 나 스스로를 기만하고 도망치고 있다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눈부신 안부> 속 주인공 해미는 거기에서 한층 더 나아간다. 갑작스러운 상실의 아픔이 두려워 선뜻 쉽게 가까워지길 어려워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흘러 잊고 있었던 마음과 기억을 꺼내 다시 그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시간을 건너 우리 앞에 나타난 소중한 인연들에게 점차 마음을 열고 다가간다.


시간이 아무리 흘렀지만, 지금 있는 바로 그곳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 나는 그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과거를 안고 현재를 눈부시게 살아가는 것. 나는 그들의 이야기가 그토록 읽고 싶었나 보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자신을 꽁꽁 싸매고 살아가기보다, 설령 상처받고 실망할지라도 서로를 향한 다정한 마음이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게 하는 그런 세상을 바란다.


멀리서 바라보는 타인의 삶은 납작해 보인다. 몇 가지 단어로 요약된 누군가의 인생. 때때로 내 삶조차도 그렇게 납작하게 압축하여 무미건조하게 바라보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에 익숙해져선 안된다. 계속해서 자신의 이야기를 돌아보고 다시 써 나가야만 나를 둘러싼 타인의 삶도 긍정하고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때때로 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조차도 힘겨워질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 이런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소설에는 다정한 사람들이 많이 나온다. 자신의 고통 속에서도 타인을 바라보고 마음을 나눌 줄 아는 사람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리고 귀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이야기를 읽는 내내 그들이 내게 안부를 전하고 물어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눈부신 안부를 묻고 전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 중에서 나는 누구에 가까울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리고 매우 의외의 인물이 떠올랐다. 소설의 후반에 잠깐 등장하는 “이영오”라는 인물이다. 나름의 굴곡진 삶을 살았을 그도 은퇴를 하고 또 다른 인생을 걸어가고 있다. 그의 인생 이야기를 상세하게 알 순 없지만 과거의 기록(문집)을 소중히 간직하고 누군가에게 그걸 내어주어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자 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이야기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인물이지만 나는 왠지 내가 그런 사람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주인공 해미처럼 적극적으로 과거의 누군가를 찾아 나서진 않지만 지나간 시간과 인연을 긍정하고 자신의 기억을 조금이라도 나눠주는 사람. 그들에게도 눈부신 안부를.

매거진의 이전글 별의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