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내줄 시간이 이제 없다."
아이를 키우노라면 내 기억 속엔 없는 나의 어릴 적 모습을 마치 거울로 보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내가 세상의 빛을 처음 보던 순간, 한낮에 기분 좋은 낮잠에서 깨어날 때쯤 내 가슴 위에 살포시 놓인 엄마 팔의 무게감과 엄마의 손가락을 내 손으로 힘껏 쥐었을 때 느껴지는 포근함, 정신없이 기어가다 돌아봤을 때 나를 보고 있던 엄마의 미소, 처음 무언가를 잡고 일어섰을 때 손뼉 쳐주며 기뻐하던 엄마를 보고 지었던 뿌듯한 표정. 이 모든 것이 내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있진 않지만 그런 아이를 보면 나의 어린 시절을 엄마의 시점에서 다시 경험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라는 인간은 내가 경험한 것 밖의 세상을 알지 못하고 그마저 기억에 남겨지지 않은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고 흘려보내며 살아가지만, 나는 종종 타인의 시선으로 타인의 삶을 경험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건 내 좁은 세상 안에 갇히지 않고 조금이라도 넓은 세상을 호흡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건 활자화된 이야기를 읽는 행위이다. 활자 안의 세상은 때론 무한하게 느껴진다. 나라는 틀에 갇혀, 일상의 바쁨을 핑계로 보고도 지나친 것들, 어렴풋하게 느끼지만 결국 언어화되지 못하고 구름처럼 사라진 것들을 누군가는 글로 풀어놓았다. 그 글들을 읽으며 내 안에 떠오른 것들이 이런 것이었구나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을 느끼기도 하고, 언젠가 내가 경험할 세월을 미리 느껴보기도 한다.
나는 종종 시간여행에 대한 상상을 하곤 하는데, 내가 예전에 쓴 예전 일기를 읽을 때 그때로 돌아간 기분을 느껴보기도 하고 나보다 오랜 세월을 경험한 이들의 글을 읽으며 그 나이가 되었을 무렵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기도 한다. 나만의 시간여행이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평범한 삶을 살다가 갑자기 뇌에 이상이 생겨 이해할 수 없는 증상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의사의 입장에서 쓴 책이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은 정말 아내를 모자로 착각하기도 하고(?!) 신발을 바로 앞에 두고도 인지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어리둥절해하면서 신발을 찾기도 한다. 이 알 수 없는 증상들, 불가해한 어려움을 겪는 환자들을 관찰하고 글로 풀어낸 이는 올리버 색스라는 이름의 신경정신과 의사였다. 꽤 긴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는 글쓴이의 따뜻한 마음이 구석구석 느껴졌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엉뚱한 행동과 말을 당연하다는 듯이 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당장 이해할 수 없지만 시간을 갖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행동 뒤에 어떤 이유가 숨겨져 있을지 인내심을 갖고 관찰한다. 누군가 쓴 글을 보면 적어도 그 글 속에 녹아있는 삶에 대한 글쓴이의 태도나 마음이 느껴진다. 그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올리버 색스는 2015년 여든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맙습니다 Gratitude>라는 책에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쓴 네 편의 에세이가 담겨있다. 한 권의 수첩처럼 작고 가벼운 책이지만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지나온 삶에 대해 고마움을 느끼며 남은 삶을 소중하게 여기며 누구보다 충만하게 살기 위한 여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는 아직 여든을 경험해 보지 못했지만 그의 글을 읽으며 80년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았고 내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올리버 색스는 여든이란 세월을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렇게 말한다.
여든 살이 된 사람은 긴 인생을 경험했다. 자신의 인생뿐 아니라 남들의 인생도 경험했다. 승리와 비극을, 호황과 불황을, 혁명과 전쟁을, 위대한 성취와 깊은 모호함을 목격했다. 거창한 이론이 생겨났다가 완강하게 버티는 사실들에 못 이겨 거꾸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덧없는 것을 좀더 깊이 의식하게 되며, 아마도 아름다움까지 보다 깊이 의식하게 된다. 여든 살이 되면 이전 나이에서는 가질 수 없었던 장기적인 시각과 자신이 역사를 몸소 살아 냈다는 생생한 감각을 갖게 된다. 나는 이제 한 세기가 어떤 시간인지를 상상할 수 있고 몸으로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마흔이나 예순에는 할 수 없었던 일이다. (...) 이전의 억지스러웠던 다급한 마음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탐구하고 평생 겪은 생각과 감정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시간이다.
글 제목 수은, 출처. <고맙습니다>, 올리버 색스, 20p
위대한 성취와 짝을 이룬 깊은 모호함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나는 이런 것을 궁금해한다. 때로 글은 모든 것이 비유처럼 느껴진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많은 것을 비유로 말한다. 내가 겪은 어떤 것을 남에게 설명할 때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그건 마치... 와 같아."라고 말한다. 깊은 모호함. 내가 앞으로 경험하게 될 것들, 이미 경험했지만 지나쳐 버린 것들을 올리버 색스가 언급한 깊은 모호함이란 폴더로 분리해 본다.
이 책에 실린 에세이 중 <나의 생애 My Own Life>라는 글은 그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고 고민 끝에 그 사실을 밝힌 글이다. 죽음이 두렵지만 그보다 앞서 지나온 삶에 고마움을 느끼며 삶에 초연하면서도 남은 시간을 충실하게 보내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지는 글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 것에 내줄 시간이 이제 없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자신과 일, 친구들에게 좀더 집중하고자 한다. 내 삶, 곧 나의 시간은 유한하다. 그 한정된 시간 동안 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무한한 삶을 살 것처럼 오늘도 내일도 아닌 먼 미래를 위해 지금을 보내왔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의 삶은 어때야 하는 것일까? 그 답을 올리버 색스가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내가 그처럼 여든까지 살리라는 보장도 없다. 운이 좋다면 더 긴 세월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한 건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유한하다는 것.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리라 다짐하며 오늘이란 시간을 시들하게 보내지 말고 바로 지금 그 삶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어본다. 언젠가 글을 써야지, 언젠가 여행을 해야지, 언젠가 가족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지가 아니라 지금 그 삶을 살아가리라고. 꼭 필요한 것, 내 삶에 있어 중요한 것들로 시간을 채우리라고.
올리버 색스가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나의 생애> 원문 링크를 덧붙입니다.
https://www.nytimes.com/2015/02/19/opinion/oliver-sacks-on-learning-he-has-terminal-cance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