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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꾸고 있는 꿈은 정말로 당신의 꿈일까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할 때

by 나날

1995년 도쿄 지하철 사린사건 피해자를 인터뷰한 책 <언더그라운드>에서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는 개인과 사회 시스템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인간은 완전하게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회와 공동체 속에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다. 이미 만들어진 규칙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서 그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동시에 자신만의 자율성을 획득하며 살아간다. 바꾸어 말하면 여러 개인이 존재하는 거대한 사회라는 시스템은 각 개인의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를 어느 정도 억압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어떤 보이지 않는 틀(시스템)이 존재하고 개인은 그 틀과 자아의 적절한 균형점을 선택하여 자율성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인식해야 하고 그것에 제한을 가하는 사회 시스템에 부딪혀가면서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지점을 계속해서 찾아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아 인식을 바탕으로 인생이라는 고유하고 일관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 "이야기란 당신이 꾸는 꿈"이다. 이야기 안에서 우리는 주체인 동시에 객체이며, 종합인 동시에 부분이며, 실체인 동시에 그림자다. 이야기를 만드는 '메이커'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체험하는 '플레이어'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709p)


앞서 말했듯이 개인이 사회와 부딪히면서 이야기를 체험하는 동시에 만들어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로는 깎여 나가야 하고 때로는 새로운 길을 뚫어야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옴진리교의 신도들이 이러한 투쟁을 포기하고 자아를 아사하라 쇼코라는 교주에게 헌납하고 그의 자아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고 진단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느끼는 께름칙함, 의식적으로 배제해야만 하는 찝찝함이 발생한다. 실은 우리도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면서 자아를 그에 맞추어 일부분 포기하면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여기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 나간다.


당신은 누군가(무언가)에게 자아의 일정한 부분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서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어떤 제도=시스템에 인격의 일부를 맡기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렇다면 그 제도는 언젠가 당신을 향해 어떤 '광기'를 요구하지 않을까? 당신의 '자율적 파워 프로세스'는 올바른 내적 합의점에 도달해 있는가?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야기는 정말로 당신의 이야기일까? 당신이 꾸고 있는 꿈은 정말로 당신의 꿈일까? 그것은 언제 어떤 악몽으로 변해버릴지 모르는 누군가의 꿈이 아닐까?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712p


이 질문 하나하나가 나를 찌르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나의 이야기다.


나는 어릴 적부터 타인의 이야기를 잘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세상의 모든 어린 아이들이 그러하듯 "왜"라는 질문을 항상 품고 있었고 실제로 소리 내어 질문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냥 주어진 룰을 받아들이고 그에 맞춰 플레이하면 많은 것들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이 기대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단순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빠르게 습득하고 내가 그것을 습득했다는 것을 단기간에 보여주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비교적 수월하게 비껴갈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배운 많은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해한 척했고, 이해했다는 것을 검증하는 제도(시험)를 통과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너무 눈에 띄지 않게 그렇지만 뒤처지지도 않게 내게 주어진 시험들을 통과해나갔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쳤다. 학교 밖 세상은 나에게 더 고도화된 능력을 요구했고, 그것은 곧 질문하는 능력이었는데 난 안일함에 빠져 그 능력을 잃어버렸다.


게다가 내가 받아들인 이야기는 나의 자아가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것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경쟁"이었다. 그 경쟁에서 비교적 손쉽게 1등을 차지할 수 있었을 때, 나는 그것이 나의 노력의 결과이고 더 나아가 나의 정체성이라고 받아들였다.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나보다 더 노력한 사람보다 내 결과가 좋을 때는 내 능력이라고 생각했고, 나보다 덜 노력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뒤를 쫓아야 할 때는 설명되지 않는 좌절감을 느꼈다. 때로는 비교적 쉽게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성취감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다 공정한 경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참을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다 곧 그 이야기도 받아들였다. 그 이야기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나섰다. 여전히 불공정한 일들에 분노했지만 그 안에서 내가 받을 수 있는 혜택에 어느 정도 만족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슴 한 구석에 여전히 질문을 품고 있다. 누구를 위한 경쟁인가? 이 안에서 내가 얻는 것과 잃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까지 이 꿈이 지속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받아들인 이야기 속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을 교묘하게 피해 가며 살아왔다. 이제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그 이야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할 때가 아닌지,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할 때가 아닌지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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