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지나간 자리

"그 이후로 좀더 긴 안목으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고 할까요."

by 나날

1995년 3월 20일, 사린가스가 뿌려진 도쿄 지하철에는 일본인만 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기수로 활동하고 일본에서 말과 관련된 기술을 가르치던 아일랜드인도 사린가스 피해를 입었다. 그는 한평생 말과 함께 해 오면서 가장 중요한 기수의 자질은 말과 소통하는 능력이라고 강조한다.


현역에서 기수 생활을 하며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체력적, 정신적으로도 항상 힘들고 긴장된 생활을 해왔지만 말에 대한 애정과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낯선 땅에서 예기치 못하게 맞닥뜨린 생명을 위협하는 사고는 그의 삶을 돌아보게 만든 듯하다. 사건 후에 내면적으로 뭔가 변한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글쎄요, 그 이후로 좀더 긴 안목으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고 할까요.


살면서 이런저런 일에 대해 망설이고 고민하고 결국 선택하지만, 세상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미리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대처할 수도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나의 인생.
말을 타는 것이 내 인생의 모든 것이었어요. 세상에 눈뜨고부터 나는 말을 탔습니다. 세계의 대형 이벤트에 나가서 몇 번이나 우승을 했습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이었어요. 지금은 젊은 기수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과 접하는 것은 그들과 더불어 말을 타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멋진 일이죠. 이것이 지금의 내 인생입니다.
<언더그라운드>, 무라카미 하루키, 312p


인생을 살다 보면 개인의 의지와 노력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사건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때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어떤 성취를 이루고 어떤 태도로 세상을 대했던 불가해한 일에 마주하는 것이다. 그럴 때 인간은 자신의 삶을 좀더 큰 시선에서 조망하게 되는 것 같다. 하루하루 살면서 내가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최선을 다해 살지만 그러다 보면 어떤 작은 부분에 매몰된다. 우리는 매우 작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잊고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껏 살아온 삶이 어떤 궤적을 그려왔는지, 앞으로 남은 삶은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큰 그림을 그리기란 쉽지 않다.


지금껏 지나온 삶, 그리고 현재 자신의 인생을 언어로 표현한 저 인터뷰를 보면서 내 인생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회에서 주어진 기대치에 맞게 그때그때 주어진 과업을 이루며 살아왔다.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취업을 하고 거기서 열심히 일하다 보니 10년이 지났다. 지금의 나에게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살지, 다른 삶을 살지 선택을 해야 할 순간이 왔음을 느낀다. 다른 삶을 산다는 것이 내게 매력적이기보다는 두렵고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살 수도 없다. 무엇이 되었든 인생의 전환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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