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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Jun 01. 2024

선택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무라카미 하루키)

서평들은 하루키다운 소설이라 일컫지만 오히려 게이고(히가시노 게이코)가 쓴 소설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개인적으로 하루키 소설보다 게이고 소설을 더 많이 읽은 나로서는 몽환적 판타지에 더 익숙한 습성의 흐름 아닌가 하고 심각하지 않게 생각해 본다.


'나'가 당연히 주인공이며 선택의 매개체이자 주제이기도 한 인물인데 페이지가 긴 소설에 반해 주변인물은 16살 소녀, 고야스 씨 그리고 노란 잠수함(옐로 서브마린) 소년등 핵심인물은 몇 안 되는 소수의 인물이 등장한다.


나는 여기서 노란 잠수함 소년을 주목한다. 이 도시에서 영위할 수 없는 비범함과 동시에 어눌함을 갖추고 태생한 소년은 이미 저 도시로 이주하여야 하는 확정적 선택의 인물로 묘사된다. 비범함이란 영가(스피리추얼)적 능력으로 초능력 같은 신체적 정신적 비범함을 말하는듯하다.


그래서 정상적인 교육시스템에서 벗어나 도서관에서 책만 보는 인물인데 결국 주인공 '나'를 독려하여 다른 도시로의 범주를 열어주는 스승 또는 친구 같은 역할이다. '나'는 선택의 두려움을 주변사람들의 도움으로 벽을 허물고 또 다른 도시로 이주하는 측면에서,


'나'의 내면적 자아와 분리된 자아의 설명적 스토리에서는 이해가 되지만 노란 잠수함 소년 또한 스스로 벽을 넘어 이주해 온 인물이라면 소년은 두려움 없는 확신이 있는 결정론적 인물로 볼 수밖에 없다.


차라리 벽사이 도시에서 갈등하는 이도저도 아닌 분열된 '나'로 살기보다 노란 잠수함 소년처럼 의심하지 않고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타고난 인물이 덜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벽, 도시에서 풍기는 단어 의미처럼 이 소설의 서평은 어렵듯 쉬운 듯 간결하게 나타내어진다. 소설 속 '마르케스 가르시아' 작가가 인용되는 등 여러 혼란을 주지 않는 일관적 스토리를 유지하며 시대를 걸쳐 각색한 1부, 2부, 3부의 내용을 깔끔하게 재탄생시킨 작가의 수고가 느껴진다.


노란 잠수함 소년은 벽을 허물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 현실에서 영위할 수 없는 비범함은 또 다른 천형인가? 외로움을 안고 가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는가? '나'란 주인공보다 노란 잠수함 소년의 관점에서 다시 쓰인다면 이 소설은 중심을 잡을 수 있을까?


선택이란 그런 것이다. 작가가 인물을 선택할 수 있고 소설 속 인물은 자아를 선택할 수 있고 책과 도서관을 통한 내면적 가르침은 우리를 모두 선택하게끔 한다. 비극적 선택도 있을 수 있고 무모한 선택도 있을 수 있다.


삶의 선택이란 자아와 또 다른 자아(그림자)의 화합을 가장한 투쟁이 아닌 자연스러움이면 안 되는 것일까? 소박한 외로움도 안고 갈 삶이라면 그 선택 또한 존중받아야 하며 벽속에서 갇혀사는 삶이 구원받아 나왔다면 그다음부터는 자신의 발로 걸어갈 수 있게 길을 비켜주지는 못하는 걸까?


선택적 자아인 '나'보다 주제적 자아인 노란 잠수함 소년이 더 뇌리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만에 읽은 하루키소설은 역시 읽을만한 소설만 쓴다는 느낌의 연장선에서 책이 독자를 선택하면 기꺼이 손을 들고 책으로 향할 것이다.


왜냐하면 소설 속에는 항상 의외의 인물이 주인공 못지않은 비범함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로 돌아와 지금의 나(진짜 나)의 선택은 타당한 것인가?라는 근원적 물음에서 출발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시간은 망각을 동반하고 지겨움을 수반한다.


서로 망각하고 지루함을 버텨 무관심해지기까지는 시간문제일 뿐 관심도 협조도 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얻는 것은 무엇인지는 스스로 알아지는 자득에 의해 주인공은 고통을 감내한다치더라도 제삼자는 관심과 무관심 속에서 무엇을 획득한단 말인가?


소설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주인공 '나'로 살 것인지? 노란 잠수함 소년으로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다른 등장인물로 살아갈 것인지? 그리고 노란 잠수함 소년은 자신의 선택과는 관계없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유니크함을 행복하게 생각할까?


파괴적인 삶과 질서 정연한 삶의 차이는 결국 등장인물의 역할의 이탈일 것이다. 스스로 알아지게 되는 자득 또한 시간이 정해준 숙연한 수용의 자세라면 작가는 잘 짜인 질서 정연한 삶의 스토리로 중무장하고 독자들의 선택을 받아야 할 것이다.


결국 우리 삶은 소설과 흡사하지만 삶은 소설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버텨 견뎌내는 망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움 그 자체인 것이다.


-2024년 6월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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