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작가 위주로 책을 읽다 보면 한 작가의 표현과 서술이 유사하여 이에 파생되어 또 다른 작가 작품에 몰두하는 경향이 생기게 된다. 전자의 작가는 '김훈'이고 후자의 작가는 '이승우'이다. 두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든 간에 그 무엇의 유사성을 억지로 연관시킬 의도는 서로 다른 본래의 색깔에 더 다가서려는 독자의 노력일 수도 있다.
이승우 작가답지 않는 작품 '식물들의 사생활'은 작가가 누군지 모르고 읽었다면 이승우 작품이 아닐 텐데(!) 하는 기존 작품의 필력에서 한발 유연해진 그리고 '사랑'이란 주제를 다룬 면에서 다소 신선했다. 김훈, 이승우 작품에 '사랑'은 친근하지 않은 주제이다. 충동적이고 욕망적이고 야만적인 사랑 아닌 사랑이라면 몰라도.
작가가 집필기간 내 극심한 고통이었다는 말에 격하게 공감이 갈 정도로 소설의 시공간의 각도가 딱 들어맞는, 명분과 행위의 연관성을 우연에만 지탱하지 않는 탄탄한 구성력으로 그렇지만 사랑이란 고귀함을 안착시키는데 작가는 얼마나 반복적인 작업을 했을까 하는 수고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 주제넘은 위로마저 내심 품었던 작품이다. 이승우 작가의 작품 또한 비극에 익숙하다. 눈물의 비극이 아닌 현실적이고 직시적인 그러면서 무기력한 삶의 고군분투하는 등장인물 속 사랑이란 방식을 그렇게 투쟁적으로 서술하지는 못할지 언데 그럼 어떻게 이 비극을 분노나 멸시가 아닌 외압의 불(不) 간섭과 내압의 무(無) 자괴감으로 승화시키는 업(業)에 어떻게 충실할 수 있을까? 하는 탄복이 나올만한 충분한 작품이다.
작가 따라왔으니 이참에 작품 따라 엮어보면 '식물들의 사생활'은 '내 젊은 날의 숲'을 연상시키는 허무와 심리적 절망을 나무를 통해 내면적인 희망으로 변신하는 작품들 아닌가 하는 동질감을 스스로 엮어본다. '내 젊은 날의 숲'이 김훈 작가의 첫 작품으로 읽었고 그 여운이 상당했는데 '식물들의 사생활'은 이승우 작품을 어느 정도 섭렵한 후에 읽은 작품인데 감흥 또한 유사하다. 단순 작품의 줄거리를 대신하여 '식물들의 사생활'은 인간성 극복의 현실적 난관을 이승우 방식대로 느껴본바의 그 해석대로 독자의 단순 착각이나 과잉의 몰입 또는 결핍의 편견으로 오역으로 치부될 수 있으나, 읽고 느끼는 바 흔적을 남기는 것은 오로지 그 일개 독자의 영역이니 제삼자의 전문적 서평 또는 비판에 자유롭다.
회복의 기인하는 것은 비극이다. 비극이 존재했기 때문에 절망과 망각이 연유되고 이에 회복과 희망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이 작품의 비극 또한 시대상이다. 시대가 가하는 비극 그것을 피할 수 없었고, 사랑이란 보편적 갈등을 시대마다 다르기도 같기도 하나 결국 아슬아슬한 곡예의 가슴 떨림보단 가슴 뭉클함으로 작가는 이끌어간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우현과 기현'의 사랑의 방식은 그대상에 '그 남자와 순미'라는 불고정적이고 신앙적이고 우상적인 쏠림을 내포하지만 사랑의 방식 또한 삶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단순 명료한 냉철함을 잃어버리진 않는다. 읽고 나서 사랑 못지않게 중심 잡힌 구도가 더 와닿은 이유가 작가의 주도면밀한 치밀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훈의 '남한산성'속의 삶은 처절하고 살아내야 하는 투철한 본능적이었다면, '식물들의 사생활'속 가족들 개별의 삶들은 홀로 지탱해야 할 서로의 무게를 그저 묵묵히 수긍하는 듯하는 순종적이고 숙명적인 어두운 삶의 방식으로 대조되기도 한다. 어머니와 우현의 사랑은 주체였다면 아버지와 기현의 사랑은 그 남자와 순미의 대상의 객체이다. 더 처절할 수도 있지만 어머니와 우현이 어쩌면 더 비극적으로 보인다. 즉 사랑이란 객체와 주체의 혼돈으로 이해(利害)의 정도의 틈을 파고들어 정량적인 분별을 묘사하여 피해와 가해의 구도로 몰아간다면 그것은 그저 치정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고 보면 냉철한 작가들의 손에 맞지 않는 주제가 사랑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머니, 아버지, 우현과 기현의 사랑은 이렇게 역어질 수밖에 없는 구도이다. 비극의 시초이자 시대의 불운과 겹쳐진 후 내면을 처절하게 적나라하게 표현되지만 이 작품의 압권은 후반부 아버지의 대한 사랑이야기다. 소설의 스토리의 흥미보다 인간 고유의 내면을 상처 입히지 않고 끄집어내서 묵묵히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는 작품의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이 아버지이다. 저 방식의 사랑이 가능할까? 하지만 인간이기에 허용하고 수긍하고 때론 인내하면서 어머니의 삶을 감금하듯 보호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나무 아래서 아들들에게 고백하는 대목이 이 소설이 추구하려는 바를 전문성의 해석의 도움 없이 독자가 직접 해석케 하는 중요한 대목이 아닐까 싶다.
'나무들마다 이루어지지 않는 아프고 슬픈 사랑의 사연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없었다면 이 가족은 탄생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불행을 스스로 머금고 살아갔을 것이다. 나무들처럼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슬픈 사랑을 내심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숨죽이며 이어왔고 우현과 기현이 이어받아 기원이 된 남천에서 형 우현과 순미의 재회를 예언하며 소설은 마친다. 어둠은 제 스스로 빛을 발산하여 그 어둠을 떨쳐내듯이 각자의 사랑은 또 다른 사랑과 희망으로 승화시킬 준비를 마치며 작가는 치밀한 알라바이의 구도를 남천에서 마친다.
책 마지막 장을 오랫동안 펼쳐놓은 채, '우현, 그리고 어머니, 순미'가 흘린 눈물은 독자의 울음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우현의 눈물을 닦지 않고 정화시키기 위해 내버려 두듯이 이 소설 마지막 장을 덮고 올라오는 첫 감정이 울컥함이든 그게 눈물이든, 독자의 심금을 울리는 작가의 감성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바람과 비, 그리고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는 언제나 반갑게 맞아주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들도 슬픈 사랑의 사연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는 것, 그러면서 우직하게 버팀목이 되어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면서 숲을 이루는 개별의 나무를 보면서, 그냥 의미 없이 존재하는 미물은 이 세상에 없으며 그 의미를 회복시켜 본래의 슬픔과 상처로부터 치유하는 것, 그 숭고한 예의가 바로 사랑이 아닌가 하면서 마지막 장을 덮었다.
-2022년, 때죽나무 꽃이 피기를 기다릴 수 있는, 봄비 내리는 3월 첫날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