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배운 자들이 구사하는 지배적 언어는 헛되고 또 헛되었지만 말쑥한 논리를 갖추어서 세상의 질서를 이루고 있었다.' (하얼빈 中에서)
'칼의 노래'가 이순신 영웅담이 아니듯이 '하얼빈' 또한 안중근의 항일운동담이 아니었다. 작가의 성향상 내면에 집중코자 함이나 읽는 내내 내면보단 외면에 더 날카로운 관심이 쏠렸다. 그 외면이란 당대 시대적 배경과 종교와 정치가 얽혀있는 마치 꼬여있는 실타래 외면 속 내면을 들추어보는 형상이랄까?
작가의 단편이 나오자마자 장편이 연달아 나온 경우는 처음이었고, 심지어 예고 또한 없었다. 함구하는 편이 낫겠다는 심정은 어디까지나 글쓴이의 심리이고, 책을 찍어내는 출판의 경우 자본주의 시장원리로 작동되니 그다지 작가에게 협조적이지 않았을 텐데 어쨌든 조용히 '하얼빈'은 출간되었다.
이 소설의 맥락은 하얼빈이 아니라 재판장 즉 법정이다. 도마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 후 관동도독부 검찰관 미조부치의 심문 과정에서 종교, 정치, 정의에 따른 세상 질서의 말쑥한 논리에 대한 간결한 항거인데, 미조 부치는 안중근의 정치적 토론과 논쟁의 재점화를 차단한다.
또한 빌렘 신부와 뮈텔 주교와의 종교적 신념과 인간에 대한 도의에 대한 서로의 갈등은 안중근의 동양평화는 말쑥한 논리로 무장된 종교 질서 앞에 살육의 죄악은 동조받지 못한다. 신(神)이 있다면 그도 감당하지 못하는 인간의 질서에 항거 투쟁하여 정의를 구하는 방식을 옳고 그름으로 결정 내리기엔 신(神) 또한 벅차다.
치밀한 사전모임도 없이 마치 우발적으로 서로의 생각을 묻지 않고 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우덕순과 안중근은 하얼빈에서 이토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이토의 생사에 따른 역설적 전달은 어쨌든 성공하지 못했다. 이토는 살아있다면 이토를 죽이려는 이유를 이토에게 말할 수 있으나 이토는 죽어야 되며, 이토가 죽은 후 이토가 만들어놓은 세상에 안중근의 말이 통할 순 없게 되어 있다.
슬픈 현실과 영혼의 구원이 빌렘 신부로 통하였는지 안중근은 신부에게 마지막 면회를 요청하였고 빌렘 신부와 안중근의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고받은 영혼의 교감은 아무도 알 수가 없다. 순교에 이어 순국으로 연결된 고리에 천주교의 구원의 종교적 역할은 시대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종교적 거룩함을 인간적 신념으로 극복하려는 천주교의 눈물겨운 고뇌는 계속된다.
안중근은 빌렘 신부에게 마지막 안식을 청하였던 것은 순교의 모국의 의한 핍박, 순국의 모국에 대한 핍박 속, 시대가 인간에게 가한 고통을 신앙으로 위로받기 함이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종교의 신앙적 책무에 충실한 성직자와 신자의 만남이며, 출장 불허를 거역한 빌렘 신부의 소명은 지극히 종교적이고 인간적이다.
'총구를 고정시키는 일은 언제나 불가능했다. 총을 쥔 자가 살아 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옳고 그름을 함부로 말해선 안된다. 평화의 시대에 선악의 질서는 흔들리면서도 지탱되나, 분쟁과 전쟁의 시대에 정의와 불의는 불안한 질서 속 흔들린다. 대중은 모른다 즉 알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정의로움을 함부로 내뱉으면서 신의 교시처럼 전달하려는 위정자의 세상에서는 종교 또한 우왕좌왕한다.
대중이 위정자의 범죄적 불의를 알았을 때, 그들이 그들의 말쑥한 논리의 세상 질서를 구축하기 위하여 정의와 미담을 끌어들이는 위선의 모습을 대중이 알았을 때, 항거와 투쟁은 계속되며 그들의 정치적 신념을 종교적 윤리의 영역으로 끌어들여 不義를 正義로 위장하는 역사의 질서는 혁명과 전쟁을 통해 어느 순간 종말을 고하고, 또한 선한 질서는 다시 악의로 변질되는 반복 또한 역사이다.
총구가 흔들리다 못해 총구의 방향마저 흔들리는 게 인간의 역사이다. 그러한 반복이 국가이든 민족이든 아니면 가족이든 직장이든 사적인 모임이든 모든 인간과 인간관계에서 늘 적용되며 서로 역여 있는 죄악은 실타래처럼 겉으론 바르게 정렬되어있지만 그 속엔 욕심과 탐욕이 무질서하게 생존해 있다.
인간만이 인간을 인간적으로 공격하고 몰살한다. 몰살의 방법에는 예의를 가장한 정치적 신념과 종교적 신앙 그리고 보편적 윤리를 들먹이며 재단한다. 동양평화와 살육의 명제에서 안중근을 취조하는 미조부치는 피의자의 죄를 단죄하는 검찰관의 신분이기보다, 그 시대에 논리로 그 죄를 포장하는 권력의 하수인으로 비친다.
불행한 역사 속 권력 찬탈이 국권(國權)에서 정권(政權)으로, 다시 민주시대 국민(國民)으로, 그 주체만 바뀔 뿐 백성들의 고달픔은 마찬가지여서 이제 옳고 그름으로 타인을 재단하기도 재단해서도 안 되는 시대란 걸 깨닫기 시작한다. 현재의 삶 속에 너무도 많은 비윤리적, 비도덕적 일탈의 범주가 확대되어 감히 종교적 성찰마저 잔소리로 들리는 시대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안중근의 사형이 집행된 다음날인 1910년 10월 27일 아침 빌렘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기도했다. 저 기도문이 망국의 한을 품고 잠든 안중근과 망국의 선교자로서의 정의를 지키려는 빌렘 신부와 망국의 백성으로 힘없이 살아가는 모두에게 위안의 기도문만 같다.
전쟁과 평화! 양분법 시대에서 정의와 신념 그리고 옳고 그름의 집단 공존의 관심보다는,
각자의 이해(利害) 충돌의 분쟁과 혼란! 끝없는 논쟁의 무질서로 접어든 시대를 초월한 시대!
현재 또한 슬픈 시대와 영혼은 계속될 것이며 그래서 각자는 각자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 2022년, 가을이 오는 9월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