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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vere Apr 27. 2023

일치

빛의 호위 & 아오이가든

두 권의 책에서 난해한 근접을 시도해 보았다. 한 작품은 '오이가든(편)'이고 또 한 작품은 '빛의 호위(조해진)'이다. 전자는 탈내면성을 집도한 미학적 관점이고 후자는 개인이 세계에 앞선다는 것 즉 존재의 실존적 관점이다.


두 작품의 공통성을 논(論)하려는 것보다 두 여류작가의 탈관점적 시각의 차이를 접근하여 일치하는 점에 도달하려는 독자의 노력이랄까? 물론 그 노력의 목적은 작품을 읽은 후 의식중에 발견된 문장의 속뜻을 되새겨 보는 사색에서 기록으로 남겨보 각인하고 싶어서이다.


두 작품은 쉽게 읽히기도 하지만 어렵게 이해되는 작품이라 지극히 글로만 안착할 수 있는 류이다. 영상이나 뜬구름 같은 선문답으론 전해지기 어려운 소설이 추구하는 보편적이며 진정한 그리고 부정할 수 없는 작품성이 모두 골고루 배어있는 두 작품은 서로가 각기 다르게 마주 보고 있다.


'아오이가든'은 억압의 탈승화라는 해설처럼 생물학적 부패를 통한 도달는 지점은 '다른 삶'이다. 한편 '빛의 호위'에서는 폭력이란 실재를 통한 순간 스쳐가는 빛처럼 살아게 하는 감각적인 '같은 삶'이다. 두 작품 모두 단편집 모음 또는 액자식의 구성이라 세밀한 분석보다 전체적인 흐름 속 관망하다 보면 억지스럽지만 불현듯 일치되는 지점을 추론한다.


읽는 동안 불편하진 않지만 희뿌연한 불투명이 거둬들이는 지점을 기대 없이 갈망하지만 투명한 색채를 받아들이는 해석은 전적으로 여느 소설처럼 독자의 선명함인데, 양 작품은 헷갈리는 지점이 한두 군데가 아닌 것이 많아 머릿속이 명쾌하진 않다. 따라서 분석적인 집착보다 조바심 없는 비(非) 관여적 접근이 더 자연스럽다.


거슬러 올라가 두 여류작가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 화두부터 접근하자면, 사랑? 인간성의 회복? 역사의 고통? 시대적 무기력? 이런 보편적 사유보다 더 적극적인 '삶의 역류성에 기인한 본래의 삶으로의 의지' 아닌가 싶다. 즉 작가는 특정되지 않는 그 누구에게 분열의 지점을 하나하나 의식의 흐름으로 되짚어 보란 것이다.


빛의 호위란 제목처럼 문득 플래시처럼 각인되는 살아내고 살아내야만 하는 고달픈 삶 속에 각 개인의 삶에는 '빛'이라는 호위를 찾아가는 과정이고, 아오이가든은 시체와 부패등 엽기적 표현을 통한 몽환적인 미학적 관점을 쫓아 삶의 아름다움을 새로이 찾아서 시작하라는 것이 두 작품의 내면적 아포리즘이 아닐까 싶다.


찾아서 위로하고 그 의지를 공공연한 내면에서 발휘하여 살아가는 삶의 흐름을 각기 다른 기법으로 전달하는 두 작품 속에서 단순히 기법의 창의적 발현이나 의미의 재해석은 나 같은 일반적 독자의 신분으론 너무 광의적 분석론이라 접어두고, 소설 본연의 전달과정 속 양면성의 지점을 간파하여 재정립하는 정도의 수고랄까?


단순히 흥미뿐만 아니라 이런 표현의 방식으로만 오로지 이런 기법으로만 전달되는 의미와 그 교차하는 점을 작가와 독자는 암묵적으로 콕 집어 만나도록 하는 것이 소설의 무한하고 독특한 역할이자 그 또한 무한한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한 독자의 흥미이다.


'빛의 호위'에서 작가는 '이제야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 모르겠다'는 작가의 말에서 소설은 시점에 관계없이 모든 관점에서 1인칭과 2인칭 그리고 3인칭에 대한 포괄적 시점의 근원은 자아(自我)다. 자신의 내면의 의식 속에 모든 시점은 재출발하며 그 출발지점에서 두 작품의 미학적 관점은 서로 일치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을 찾는 것이고 내면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 작품 속에서 명쾌히 찾았다는 작품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으며 아마 지구상에 그것을 내세우는 작가 또한 없을 것이다. 작가들은 내면의 심리를 전달하는 기법들을 다양하게 구사하지만 그것은 끝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간절하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단지 조금 이제야 이해하니 타인에 대한 글을 쓸 자격이 조금이라도 부여받은 고백을 조심스럽게 내비친다. 자아에서 타인으로 확대된 그 지점에서 소설은 일치한다. 아오이가든에서 묘사된 엽기적 표현의 불편함이나 빛의 호위에서 언급한 폭압적 감각은 결국 아슬한 희망을 감지하게 한다.


'아오이가든'에서 진화를 거슬러 문명의 초입으로 되돌려 놓은 시초적 환원은 '빛의 호위'에서 삶의 희망으로 재탄생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타인을 논하며, 살아있는 자아를 승화시킨다. 무엇인가 싱크(synchronize)되지 않는 비대칭은 무심코 한번 더 접은 종이에서 놀라은 일치의 맥을 발견하기도 한다.


엄연이 두 작품의 연관성을 인위적 퍼즐게임으로 집착하려는 나의 망상적 태도일 수도 있으나, 지 이 두 작품서 느끼는 일치는 주제의 공통점도, 기교의 대비도, 섬세한 여류작가의 막연한 기대도 아닌 두 작품을 연달아 읽고 연관되는 원점에서의 회귀가 아닌가 싶다.


그 일치된 지점에서 빛의 호위로 인한 연속성의 추구인지 아니면 아오이가든에서의 인간의 끝의 시작인지, 그 분열된 불확실성의 판명은 영원히 실패하는 확실성이지만, 성실하고 지속성 있는 관찰(읽는 행위)만은 본래 삶의 의지로부터의 조금이나 위안이 된다.


그래서 책은 사람들한테 꾸준하게 읽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조해진, 편영, 최은영, 김금희 등의 작가 글의 기대와 끌림으로 작용하면서도 묵직한 마초적 작가 또한 나의 비대칭적 일치성이 부합하기에, 작품을 편독하지 으려는 선호는 이질적면을 동질화시켜 주는 균형의 배열이 아닌가 싶다.


'나는 江을 거슬러서 上流로 가려한다. 모든 낱말과 시간이 새롭게 태어나는 그 始原의 물가로'  

(강산무진 서문中에서, 김훈)


-2023년 4월의  끝자락, 아래 자연에 의지하여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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