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안식, 여백의 은혜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 되게 하소서.

by 두니

오늘따라

묵직한 울림으로

눈길을 사로잡은 문장이 있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 세계의 리듬에 참여하고
창조 질서를 지키는 행동이다.'

테렌스 E. 프레다임의 글이다.


익숙했던 단어, '안식'

수없이 들어왔던 말인데

오늘은 왠지,

그 의미의 깊이를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래서 종일,

그 단어 하나를 마음에 품고 시간을 보냈다.


이동원 목사님은 안식일에는

'세 개의 창'을 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향한 창.

이웃을 향한 창.

자연을 향한 창.

안식일은 이 세 개의 창을 활짝 열고,

기뻐하며 누리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 세계의 리듬에 조화롭게 참여하는 날.

창조의 질서를 되살리고,

나와 이웃의 인생에 활력을 더하는 기쁨의 날.

무엇보다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은혜의 날.

그런 날이 안식일이라는 것이다.


말씀 앞에서

내 마음에 떠오른 단어 하나,

바로

'돌체 파르니엔 (Dolce Far Niente)'이라는

이 이탈리아어다.


이탈리아인들의 삶의 미학인

'돌체 파르니엔 (Dolce Far Niente)'의

Dolce는 Sweet '달콤함'이고,

Niente는 Nothing '아무것도 아님'으로 해석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달콤함.”

,

하는 일 없이 지내는 즐거움.

빈둥거림의 달콤함.

무위(無爲)의 즐거움.

달콤한 게으름.

일락(逸樂).... 등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마음껏 즐기며 지내는 시간의 달콤함.

그 시간을 있는 그대로 누릴 수 있는 여유.

새로운 에너지를 회복하는 시간.

이것이야말로
창조 질서 안에서 안식일이 말하는
그 기쁨의 본질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지난 대부분의 시간에

그런 자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늘 시간 낭비로, 나태함으로 느껴졌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분주하고 치열했고

계획이라는 벽 속에 나를 가두었다.

시간은 시, 분 단위로 쪼개져 있었고

내 하루는 늘 무엇인가를 만들고, 쌓고, 증명하는 시간이었다.


퇴직 이후의 삶도 다르지 않았다.


새벽 5시 반에는 어김없이 일어나려 했

행여나 알람 소리를 놓친 날은

죄책감에 놓친 시간을 만회하듯

스스로를 다그치며

잃은 시간을 채우려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오늘,

몸살을 핑계로

8시가 넘도록 이불속에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보채지도, 다그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머리는 맑았고

마음에는 어떤 조급함도 없었다.

그저, 여느 때와 달리

같은 하루를 조금 늦게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 틈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조용히 밀려왔다.

“안식.”


그 말씀 안에서

내 지난 삶의 모습을 조용히 돌아보았다.


나는 하나님의 시간을
내 계획 속에 억지로 끼워 넣고 있었다.
조급했고,

완벽해지려 애썼고,

내 방식대로 하나님을 만나려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네 안에 여백을 두어라.”


내 시간의 여백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 시간 속에서

하나님은 나를 만나시고,

그분의 창조 질서 안에 나를 두려 하셨다.

당연히 나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에 머물러야 했다.

빈둥거림의 여백,

하나님을 만나는 그 시간이

바로 안식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오늘,

갈라디아서 1장 15절 16절 말씀이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왔다.


“나를 택정 하시고
은혜로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나는 나의 시간과 여백까지
나의 욕심으로 채우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 여백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시길 원하셨다.

내 시간은
하나님의 때에 응답하기 위해
비워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기꺼이 그 여백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싶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나를 두고,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방법대로

내 시간의 빈자리를 채워가길.


달콤한 안식의 고요 속에서,

주의 음성을 듣는

순전한 사람이 되기를—

오늘도, 조용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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