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들여지는 믿음 -
“가령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 『어린 왕자』 중에서
나는 이 구절을 오랫동안 사랑했다.
열세 살, 어린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기다림'을 설렘으로 이해했고,
그 설렘을 곧 사랑이라 믿었다.
그 믿음은,
내 모든 사랑의 '기준'이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지나면서
그 설렘은 점
기대가 아닌 좌절로 바뀌었고,
사랑은 어느새
두려움의 이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앞에서 자주 멈칫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어린 왕자』의
이 구절을 다시 기억해 낸 이유는,
단지, 한 단어 때문이었다.
‘온유’.
내가 아는 온유는
그저 착하고 순한 성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나를 힘들게 했던
한 사람의 기억과 연결될 때마다
'온유'라는 이 단어는
몹시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왔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
분명한 대답을 원했던 내게
늘 침묵하거나 얼버무리던 그 사람.
나는 그를 견딜 수 없었다.
자기의 표현을 유보하고,
말 대신 침묵을 선택하던 그 사람.
그가 말하던 ‘온유’는
내게는 무능력처럼 보였다.
그런데 성경 속 ‘온유’는
내가 이해했던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말하고 있었다.
헬라어 ‘프라우테스’는
고난 속의 순종,
자기를 낮추는 겸손,
억눌린 가운데의 자제와 복종을 뜻한다.
온유란,
마음이 약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다스리는
강한 힘이었다.
그 순간,
나는 『어린 왕자』속 ‘길들임’의 장면에서
‘온유’를 보았다.
그리고 문득,
무능력해 보였던 그 사람의 태도가
어쩌면
진정한 ‘온유’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길들인다는 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이며,
그 관계는
인내와 참을성을 필요로 해.”
여우의 이 말처럼
진짜 관계는
기다림 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신앙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길들여지는 연습’을 시작했다.
관계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포기와 인내,
기다림과 믿음—
그 모든 태도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순종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삶에 하나님의 시간을
초대하기로 결심했다.
매일 아침,
‘4시에 오실 하나님’을 위해
알람을 맞추고 기다렸다.
그 기다림은
설렘이기도 했지만,
훈련이며 순종이었다.
온유는 성품이 아니라,
믿음의 태도다.
하나님의 때를 믿고,
그분의 방문을 준비하며
조용히 길들여지는 삶.
그것이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서 배우고 있는
‘온유’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그분은 꼭, 4시에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은 아무 예고 없이,
무턱대고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그분을 기다릴 준비를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