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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이 된 눈치

사회와 시선

by 지나


네이버 사전을 열어 ‘습관’을 검색하면 두 가지 정의가 나온다.

1. 어떤 행위를 오랫동안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저절로 익혀진 행동 방식

2. 학습된 행위가 되풀이되어 생기는, 비교적 고정된 반응 양식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건 두 번째다. 학습된 행동이 반복되면서 어느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 내게 그것은 바로 ‘눈치’다.


나는 늘 누군가의 표정을 먼저 읽는다. 대화 속에서 말보다 먼저 보이는 건 상대의 눈빛, 숨소리, 혹은 짧게 흔들린 입꼬리다. 거기에 내 기분이 따라 흔들리고, 말의 방향도 달라진다. 상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비칠지를 먼저 따져보는 나 자신을 발견하면, 습관이 얼마나 무섭고 뿌리 깊은지 실감하게 된다.


왜 나는 이렇게 되었을까. 내 안에 자리한 이 습관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은 ‘환경’이라는 답에 도착한다. 엄마는 늘 아빠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집안 분위기는 가부장적이었고, 엄마의 시선은 늘 조심스러웠다. 작은 말 한마디에도 공기가 얼어붙었고, 그 공포는 자연스럽게 우리에게도 흘러왔다.


엄마는 누구보다 지적이고 현명했지만, ‘아빠’라는 단어 하나가 대화에 등장하는 순간 사고 체계는 무너졌다. 합리적이던 판단은 사라지고, 두려움과 불안이 모든 걸 덮었다. 그 장면을 어린 장녀였던 내가 지켜보았고, 무의식적으로 배워버렸다.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라고.


그 결과 나는 자아가 약한 어른으로 성장했다. 겉보기에는 자기주장이 강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건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얇은 가면이었다. 속은 늘 불안정했고 쉽게 흔들렸다.


사람들은 가끔 나를 ‘양보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내 속을 전혀 알지 못한 오해다. 나는 좋아서 양보하는 게 아니다. 상대가 화낼까 두렵고, 미움받을까 불안해서 먼저 물러서는 것이다. 내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면 갈등은 빨리 끝난다. 그래서 본능처럼 양보한다. 그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상대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먼저 나서서 그들이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한다. 마치 아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순하다. 나는 그저 안전함이 필요하다. "저 사람은 나를 미워하지 않아"라는 안도감 하나로 오늘을 버티는 것이다. 결국은 나 자신이 불편하지 않으려는 몸부림. 그렇다면 이기적인 행동일까.


곰곰이 글을 쓰며 돌아보니, 나는 결국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누구도 모든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모두에게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다.


특히 권위적인 사람 앞에 서면 이 습관은 더 도드라진다. 심장은 터질 듯 뛰고, 머리는 금세 하얘진다. 말은 꼬이고, 표정은 어색해진다. 그리고 그런 순간마다 나는 엄마를 떠올린다. 아빠 앞에서 무너지던 엄마의 모습. 그 장면이 내 안에서 되살아나며, 나는 알면서도 똑같은 길을 걷는다.


이 습관은 일상 곳곳에서 고개를 든다. 회의 자리에서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 때. 친구와 식당을 고르면서 "너 먹고 싶은 거 하자"라고 말하면서도, 사실 내 의견을 끝내 말하지 못할 때. 연인과 사소한 다툼이 벌어졌을 때조차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로 급히 상황을 수습하려 할 때.


나는 안다. 이런 태도가 때로는 상대에게 편안함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하지만 결국 상처받는 건 나 자신이다.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마음은 조금씩 말라간다. "괜찮다"고 수없이 말하지만, 속으로는 괜찮지 않은 순간들이 쌓여 간다.


이 사실이 두렵다. 엄마의 습관이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는 게 끔찍하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이제 안다. 이 싸움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눈치와 이성이 늘 부딪히고, 많은 순간 눈치가 이긴다. 하지만 아주 가끔, 정말 드물지만 이성이 이기는 순간도 있다. 그때 나는 비로소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 짧은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에, 나는 다시 한번 다짐한다.


나는 그 작은 승리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눈치가 아닌 내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연습. 완벽할 수 없겠지만, 천천히라도 나아가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스스로에게 말한다.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습관이라는 이름의 그림자와 평생 싸우더라도, 결국 내 안의 목소리를 지켜내고 싶다. 그것이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진심 어린 용기일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이 다짐을 글로 남긴다.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눈치가 아닌 내 마음의 목소리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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