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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호수1>-계절이 바뀌어도 남는 마음

멀어져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 하나

by 지나


ChatGPT Image 2025년 12월 8일 오전 07_51_57.png 잔잔한 호수 위로 겨울빛이 길게 번지는 풍경, 조용한 물결이 감정의 깊이를 비추는 장면


어떤 날은 멀어진 게 분명한데도 마음이 완전히 돌아서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여전히 전화번호를 지우지 못하고, 길을 걷다 비슷한 뒷모습을 보면 괜히 발걸음을 늦춘다. 아무 일도 아닌데 마음이 흔들리고, 이미 끝났다고 수없이 말해도 한 번 더 손을 뻗고 싶어진다. 다 잊었다고 자신에게 단단하게 말해두었는데도, 작은 기척 하나가 마음속에 남아 있던 감정을 다시 꺼내 놓기도 한다.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더는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부터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벼워지지 않고 오히려 묵직해지곤 한다. 이 마음이 왜 이렇게까지 크게 남아 있는 건지 설명할 수 없지만,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오히려 오래 가는 듯하다.


사람의 얼굴은 손바닥으로도 가려지는 작은 것이지만, 그 사람을 향했던 마음은 가려지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관계를 지나오며 배운다. 보고 싶은 마음이 이렇게 커지면 어쩌면 눈을 감는 편이 더 편한 날도 있다. 무엇이 남았다고 말할 수 없는데도 그래도 남아 있는 어떤 계절 같은 감정. 오래 닫아둔 서랍을 열어보는 듯, 잠시 스친 향기만으로도 그 마음이 다시 살아나곤 한다. 떠나간 사람에 대해 더는 아무 감정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문득 찾아오는 공허함은 그 사람이 남기고 간 빈자리가 아직 온전히 치유되지 않았다는 신호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가끔은 숨을 고르듯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오히려 마음이 더 또렷해지는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어둠 속에서 잠시쯤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을 떠올릴 때마다 내 안에서는 알 수 없는 물소리가 천천히 고여 올라온다.


정지용, <호수1>.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밖에. 이 짧은 행 안에 누군가를 잊지 못하는 감정의 전부가 담겨 있다고 느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면 겨우 버틸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이 한 번 흔들리면 조용하던 호수에 금이 가는 것처럼 파문이 번진다. 멀어진 사람은 작고, 남은 마음만 넓어지는 아이러니를 우리는 한 번쯤 겪는다. 더는 볼 수 없는 얼굴인데도 그리움은 끝을 모르고 번지고, 분명 거리가 생겼는데도 마음은 그 거리를 자꾸만 환하게 비춘다. 호수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깊은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어난다. 마음도 그렇다. 아무 것도 건드리지 않아도, 누군가를 떠올리는 일만으로도 흔들리고 깊어진다.


멀어지는 사이에도 한 사람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가까이 있을 땐 몰랐던 숨결과 목소리가 역으로 마음 안쪽에 남아 버린다. 연락 한 번 없이 훌쩍 계절이 지나가도, 그 사람이 있었던 자리는 이상할 만큼 제자리에서 물을 채운다. 우리가 손안에서 놓친 얼굴이 어느 순간 마음 속에서 더 또렷해지는 건, 마음이 기억하는 방식이 몸이나 시선보다 훨씬 더 깊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워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도 결국 기억나는 건 어느 겨울 저녁에 함께 걸었던 길, 그때 흘러나오던 노래, 무심한 듯 건넨 말 한마디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아닌 것처럼 흘러가는 계절 속에서도 유난히 놓이지 않는 감정으로 남는다. 그렇게 남은 마음은 누구에게도 쉽게 보이지 않지만, 그 마음 하나 때문에 밤이 조용히 무거워지고, 말이 줄어들고, 깊게 생각하게 되는 날들이 이어진다. 잊고 싶다는 말에 늘 따라붙는 건 잊고 싶지 않다는 마음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은 계절처럼 바뀌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 달력이 몇 번이나 넘어가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없던 얼굴은 문득 떠오르고, 잊었다고 말하는 사이에도 내 안의 호수는 계속 물을 찬다. 끝난 마음이면 끝난 대로 흩어져 주면 좋겠는데 그 마음은 멈추고 머무는 법을 먼저 배운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눈을 감는다. 보이지 않는 편이 괜찮아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아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익숙하게 지나가던 길 위에서 갑자기 마음이 출렁거리는 순간, 나는 알게 된다. 그 사람이 떠나고도 한참 뒤에야 도착하는 감정이 있다는 걸. 마음은 늘 뒤늦게 도착하고, 그래서 오래 머문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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