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교 <사랑법>, 붙잡지 않아도 이어지는 마음
서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랑이 있다. 너무 가까워지려 애쓰지 않아도, 말보다 침묵이 관계를 지켜주는 순간이 있다. 강은교의 〈사랑법〉을 따라 사랑의 속도와 여백을 다시 배우는 시간.
사람을 사랑할 때 나는 종종 두 가지 마음 사이를 흔들린다. 너무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과, 그 마음을 너무 드러내면 다칠까 두려운 마음. 다가가는 속도만큼 그 뒤에 따라오는 불안도 커지는 것 같아 한 발 다가갔다가 다시 한 발 물러서는 식으로 마음이 계속 망설이는 때가 있다. 어떤 말은 너무 빨리 입 밖으로 나오면 본래의 온도를 잃고, 어떤 마음은 너무 서둘러 닿으면 제 모양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사랑에는 말보다 침묵이, 속도보다 멈춤이 더 어울린다고 믿고 싶어진다. 그때 강은교의 시 〈사랑법〉에 나오는 말들이 떠오른다. ‘서둘지 말 것’. 이 시구가 마음 안을 조용히 걸어다닌다. 서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마음. 잠시 멈춰도 사라지지 않는 관계. 사랑을 느리게 배우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면 붙잡고 싶다. 멀어지지 않게 손목을 당기고 싶고, 흘러가지 않게 마음을 틀어쥐고 싶어진다. 그런데 그런 순간일수록 관계는 근육처럼 긴장하고, 결국 더 쉽게 다친다. 그래서 내 안에 이런 생각이 오래도록 가라앉아 있었나 보다.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잡지 않고 그 마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일.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흔들지 않고 어둠을 지켜주는 일. 사랑은 상대의 고독까지 함께 데리고 걷는 일이라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꼭 내 옆에 있어야 사랑인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의 속도로 숨 쉴 수 있게 옆 공간을 내어주는 일. 너무 행복해도 무너지지 않고, 너무 힘들어도 주저앉지 않도록 서로의 고독을 건드리지 않는 거리. 그 거리가 우리를 지키는 울타리일지 모른다.
온전한 사랑은 손을 놓아도 함께라는 사실을 잃지 않게 해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포개지는 대신 겹치지 않고, 붙잡는 대신 버티어주는 마음. 어떤 날은 ‘쉽게 흐르지 말고’ 라는 말이 내 안에서 작은 숨처럼 들린다.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순간에도 각자의 어둠이 있다는 걸, 그 어둠이 때로는 누구보다 소중한 휴식이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마음. 그래서 나는 어떤 사랑은 조용히 뒤에서 등을 받쳐주는 방식으로 자란다고 생각한다. 말로 다 설명되지 않아도, 비어 있는 문장들이 서로에게 닿아서 안도감을 주는 관계. 서툼이 흔들림이 되지 않게 지켜주는 깊이. 나는 그런 사랑을 좋아한다.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해도 마음이 완전히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흔들리는 감정보다 오래 남는 게 있었다. 서둘러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지는 깊이, 아무 말 없이도 함께 움직이는 호흡, 멀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다시 이어지는 방향감각. 그게 느린 사랑의 윤리였다. 감정이 확신을 얻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을 서로에게 허락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멀리, 더 오래 나아갈 수 있었다. 속도가 느려도 방향을 잃지 않는 마음. 그게 사랑의 기술이라면 나는 오늘도 조금씩, 천천히 그 기술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가끔은 의심이 찾아와 마음을 흔든다. 내가 혼자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느린 속도가 더 멀어지는 길은 아닐까. 그럴 때마다 마음 안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린다. 너무 빨리 피어난 꽃은 쉽게 지고, 너무 성급한 강물은 쉽게 말라버리는 법이라고.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금 느리게 사랑한다. 급하게 흘러가지 않고 쉽게 피어나지 않으려 한다. 서둘러 마음을 증명하지 않아도 이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믿고 싶어서. 사랑이란 결국 서로를 잃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어가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젠가 돌이켜봤을 때, 우리가 함께 지나온 길이 오래 남기를 바랄 뿐이다.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는 사실이 오늘 밤 유난히 안도감으로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