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못한 마음이 편지의 형태를 띨 때
사랑에 대해 오래 말하고 싶지 않은 날이 있다.
그저 마음 한쪽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어떤 장면만 떠오르는 날.
김남조의 〈편지〉를 읽은 건 그런 시간이 필요했던 순간이었다.
사랑이 단순히 따뜻하거나, 슬프거나, 아름답기만 한 감정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시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그 문장 하나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누군가의 미소가 오래 남고, 작은 말 한마디가 하루를 밝히고,
이유 없이 마음이 부드러워지던 순간들.
그 모든 것이 이 짧은 문장에서 다시 살아났다.
그런데 곧이어 시인은 이렇게 고백한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었다.”
이 두 문장이 나란히 놓여 있을 때,
사랑의 깊이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아낄수록 마음은 더 세밀하게 움직이고,
그 세밀함 속에서 불안과 기쁨이 동시에 일어난다.
사랑하면서 외로워지는 마음.
그 마음을 이름 붙이기 어려운 건,
그 속에 여러 감정이 겹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는 이어서 이렇게 속삭인다.
“내 안을 비추는 그대는 제일로 영롱한 거울.”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어떤 울림이 올라온다.
사랑을 한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을 더 뚜렷하게 마주하게 되는 일이다.
그 사람을 통해 보이는 내 모습이 예전과 다르게 느껴지고,
숨기고 싶었던 부분까지 또렷하게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불편하면서도 이상하게 따뜻했다.
시 속의 화자는 “그대에게 매일 편지를 쓴다”고 말한다.
전하지 못한 감정은 종종 글의 모양을 띤다.
만약 그 편지가 실제로 상대에게 도착하지 않더라도
이미 마음 안에서는 충분히 적혀 있는 문장들이 있다.
혼자 적어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조금씩 차분해지고,
말하지 못한 감정이 형태를 갖추기 때문이다.
시의 마지막 문장은 오래 마음에 머무는 고백처럼 다가온다.
“그래서 이 편지는 한 번도 부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오랫동안 생각에 머물렀다.
사랑이 끝났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끝내 말하지 못한 마음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건네는 순간 관계가 지나치게 달라질까 두려운 마음,
말하지 않으면 사라질까봐 조용히 붙잡고 있는 마음.
그 사이에서 오래 맴도는 시기.
사랑은 종종 그 조용한 맴돌음 속에서 가장 진하게 남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다.
잘 지내는 날에도 문득 방심하면 마음이 예민하게 반응하고,
작은 어긋남 하나에도 오래 머물 때가 있다.
그러나 그런 움직임이 있다고 해서
그 관계가 흔들리고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 깊어서 생기는 감정에 가깝다.
이 시를 읽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사람에게서 위안을 얻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
그 사람 앞에서 드러나는 내 마음이
조금 더 솔직해지는 느낌 때문일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고, 따뜻하고, 때로는 아픈 감정들이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기도 한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끝나지 않은 감정의 흔적이다.
전달되지 않아도 그 안에는 충분히 남아 있는 마음이 있고,
그 마음은 언젠가 또 다른 말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지금은 다 쓰이지 않아도 괜찮은 문장처럼.
사랑은 그런 미완의 상태에서도 조용히 자라기 마련이다.
오늘 나는 이 시를 읽고,
사랑하는 까닭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보다,
그 사랑 속에서 발견된 ‘나’의 모습이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어쩌면 그게, 사랑을 계속하게 만드는 이유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