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마음이 자라는 시간이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어떤 ‘시간’의 감각으로부터 비롯된다.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 생기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말과 눈빛,
하루의 표정과 숨결까지 기억한다.
그 간격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불안과 그리움 사이에서 진동한다.
그 진동 속에서 사람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의 무게를 단다.
기다림이란 결국 그 무게를 견디는 일이다.
사랑이 얼마나 깊이 이어질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며,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을 스스로 매만지는 조용한 인내다.
모윤숙의 시 〈기다림〉은 이 감정의 가장 오래된 풍경을 보여준다.
시 속 화자는 상대의 부재를 한 줄 구슬로 꿰며 시간을 잇는다.
그 행위는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사랑이 욕망이 아닌 지속으로 남기 위해 감정을 다스리는 일이다.
기다림은 상대를 향한 충동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정돈하는 느린 일이다.
그 느림 속에서 사람은 관계의 온도를 되새기고,
사랑이 사라지지 않도록 마음의 중심을 단단히 붙잡는다.
그렇게 버티는 동안 감정은 조용히 깊어지고,
그 깊이는 결국 관계의 품격이 된다.
<기다림〉 / 모윤숙
천 년을 한 줄 구슬에 꿰어
오시는 길을 한 줄 구슬에 이어 드리겠습니다.
하루가 천 년에 닿도록
길고 긴 사무침에 목이 메오면
오시는 길엔 장미가 피어 지지 않으오리다.
오시는 길엔 달빛도 그늘 짖지 않으오리.
먼 먼 나라의 사람처럼
당신은 이 마음의 방언을 왜 그리 몰라 들으십니까?
우러러 그리움이 꽃 피듯 피오면
그대는 저 오월강 위로 노를 저어 오시렵니까?
감추인 사랑이 석류알처럼 터지면
그대는 가만히 이 사랑을 안으려나이까?
내 곁에 계신 당신이온데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의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
-
이 시는 그리움의 언어가 아니라 존재의 지속을 노래한다.
사랑은 감정의 속도가 아니라 느림의 결로 다가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백을 견디는 순간에야
비로소 관계의 온도가 생겨난다.
기다림은 상대를 향한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을 잃지 않으려는 자신과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지켜지는 동안 사랑은 형태를 바꾸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기다림은 마음의 가장 느린 형태다.
그 느림 속에서 사람은 상대의 부재를 견디고, 스스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사랑이란 결국 그 부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의 언어다.
기다림이 짧을 때 사랑은 욕망에 가깝고,
길어질수록 책임의 온도에 닿는다.
그 시간 동안 사람은 타인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고,
사랑은 서두르지 않는 성숙으로 자라난다.
보이지 않는 고요 속에서 사랑은 부드럽게 변하고,
그 변함이 관계의 여백을 더 단단하게 만든다.
기다림은 단순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행위가 아니다.
그건 자신을 가다듬는 일이고,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다.
그 시간 동안 사람은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면서,
자신이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지를 돌아본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감정의 모양은 단단해지고,
말보다 더 깊은 신뢰의 형태로 변해간다.
그래서 진짜 기다림은 그리움이 아니라 성숙이다.
사랑이 한 계절을 통과할 수 있도록 붙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 바로 그것이다.
사랑의 진짜 시간은 만남보다 기다림에 더 가깝다.
기다림이 없으면 관계는 흘러가 버린다.
잠시 멈춰 설 수 있는 사람만이 그 관계의 결을 다시 느낄 수 있다.
사랑이란 그 느림을 견디는 용기이자,
멀어짐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감정의 윤리다.
기다림의 끝에 무엇이 오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 기다림이 자신을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었다면, 이미 충분하다.
사람은 그 느림의 시간을 통과하며 사랑을 다시 배운다.
기다림은 그래서 언제나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