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사랑하는 까닭>과 사랑이 머무는 시
가끔은 감정이 떠나지 않은 채 멈춰 있을 때가 있다.
말이 다 닿지 못한 자리에서 숨처럼 고여 있다가,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마음을 두드린다.
사랑이 끝난 줄 알았던 순간에도,
사실은 그 감정이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
천천히 모양을 바꾸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오래전의 어느 표정과 목소리를 떠올린다. 늦은 가을 오후, 창밖의 햇살이 기울어가던 시간. 누군가의 손등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유난히 선명했던 순간. 그때는 몰랐다. 그 풍경이 이렇게 오래 남을 줄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빛나는 순간만을 기억하는 일이 아니라 흐려지는 날까지 함께 품는 일이라는 것을. 그 무게가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그때 한용운의 시 <사랑하는 까닭>이 다시 마음을 건드린다.
그는 젊음과 늙음, 미소와 눈물, 삶과 죽음까지
사랑이 머무는 자리의 깊이를 말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까닭> - 한용운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홍안(紅顔)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백발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미소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눈물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내가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까닭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건강만을 사랑하지마는
당신은 나의 죽음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이 시를 읽을 때마다 마음이 오래 머무는 부분이 있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건 대개 아름답고 선명한 순간들이다.
젊은 얼굴, 환한 웃음, 건강한 하루.
그런데 한용운은 그 반대편을 말한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일이 한쪽에만 기울어진 선택이 아님을 보여준다. 젊음뿐 아니라 늙어가는 얼굴을 바라보는 마음, 미소뿐 아니라 눈물의 시간을 기꺼이 옆에 두는 마음, 건강뿐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까지 함께 걸어가려는 마음. 시인은 사랑의 조건을 나열하는 대신, 사랑이 품어야 하는 것들의 목록을 조용히 펼쳐놓는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정점의 순간으로만 기억하려 한다. 처음 마주쳤을 때의 설렘, 가장 행복했던 어느 날의 표정,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던 대화. 그런데 삶은 정점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간은 흐르고, 얼굴은 변하며, 웃음 뒤에는 눈물이 찾아온다. 한용운이 말하는 사랑은 바로 그 흐름 전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은 단순한 애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를 통과해 가는 느린 빛 같은 것이다. 쉽게 불타올랐다 꺼지는 불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결이 깊어지는 온도. 누군가의 홍안을 좋아하는 건 쉽다. 하지만 그의 백발을 사랑하는 건 시간을 함께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약속이다.
우리가 진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눈부신 순간이 아니라 빛이 바래가는 시간 속에서도 손을 놓지 않는 마음이 아닐까. 그 누군가의 미소에 반했다면, 그의 눈물 앞에서도 함께 머무를 수 있는가. 건강한 모습을 사랑했다면, 몸이 약해지고 목소리가 작아질 때도 여전히 귓가에 기울일 수 있는가. 그런 질문들 앞에서 우리는 자주 머뭇거린다.
사랑이 멈추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조차, 그 감정은 사라진 게 아니라 조용히 숙성되는 중인지도 모른다. 조급한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이 서둘지 않는 방식으로 우리를 변화시킨다. 감정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천천히 자란다. 급하게 키운 마음은 쉽게 시들지만, 오래 머문 마음은 뿌리가 깊다.
가끔은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 두렵다. 아픔을 다시 꺼내지 않기 위해, 오래된 장면을 흔들어 깨우지 않기 위해 감정을 멈춰 두는 것이다. 그렇게 묻어둔 감정은 가끔 잊혀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멈춘 감정은 사라진 감정이 아니다.
한용운이 말한 사랑은 빛나는 순간만이 아니라 그림자가 드리워진 시간까지 받아들이는 마음이었다. 그렇다면 멈춤은 끝이 아니라, 다시 이어가기 전의 고요한 호흡 같은 것이리라. 숨을 참는 게 아니라 깊게 들이마시기 위해 잠시 멈추는 것처럼.
누군가의 젊은 날을 좋아했다면 그의 백발을 사랑하는 일도 가능하다고 믿는 마음. 웃음을 기억했다면 눈물의 결도 함께 기억하는 일. 건강한 몸을 사랑했다면 죽음 앞에서 떨리는 손까지 함께 마주하는 일. 이것이 시인이 말하는 '까닭'이 아니었을까.
감정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고 다른 층위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멈춰 있는 줄 알았던 마음이 어느 날 문득 살아 움직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깨닫는다. 사랑의 속도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느리고, 누군가의 생을 함께 바라본다는 건 결국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걸.
한용운의 시는 오래전에 쓰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우리 마음을 흔든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나 보다. 우리는 여전히 홍안에 끌리고, 여전히 백발 앞에서 머뭇거린다. 여전히 미소에 안심하고, 여전히 눈물 앞에서 당황한다.
그러나 진짜 사랑은 그 모든 걸 통과하는 것이다. 시인이 '까닭'이라고 부른 건 바로 그 통과의 의지가 아니었을까. 조건이 아니라 선택. 순간이 아니라 지속. 완벽함이 아니라 온전함.
멈춘 감정을 다시 바라보는 건 쉽지 않다. 사랑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 아프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마음의 속도에 맞춰 숨을 고를 수 있다면, 우리는 조금 천천히라도 다시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급하지 않게. 조급하지 않게. 다만 깊게.
한용운의 시가 가만히 건네는 마음은 이런 게 아닐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홍안의 순간에만 머무는 감정이 아니라 백발의 시간까지 함께 걸어가려는 결심 같은 것. 그건 화려한 선언이라기보다 조용히 다짐하는 마음에 더 가깝다.
오늘 내가 멈춘 감정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는 건, 사랑이 끝나서가 아니다. 아직 이어질 자리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가장 아름다운 부분일지도 모른다. 빛나는 시작이 아니라, 함께 늙어가는 그 끝에서 비로소 우리는 사랑의 진짜 이름을 부를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