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인간 프로젝트> 부정인간에게 나타난 첫 번째 행운
이 인간에게 행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행운이자 축복이라고 말한다면 지금의 남편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남들이 말하는 객관적인 기준은 다 때려치우고, 이 남자 인간은 온전히 그를 믿어주고, 지지하고 언제나 그의 편이었다. 결혼한 지 20년, 만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도 변한 건 없다. 심리적으로 자꾸 흔들리는 그 옆에서 묵묵히 그를 지켜주었고 힘들어하는 그를 보며 함께 아파하고 화를 냈다. 순수한 감성의 무던한 감정의 인간이 '부정인간'이자 '허무인간'에게 나타난 것은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온전한 내 공간에서의 시작은 '편하다', '후련하다'였다. 결혼 전에는 거실에서는 늘 시끄러운 티브이 프로그램 소리가 났다. 거실에 있는 누군가 (엄마나 아빠, 아빠일 가능성이 크다)의 큰 소리나 한숨 같은 숨소리에 항상 주눅 들어 있는 이 인간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었다. 동시에 '내가 무슨 잘못했나? 무슨 일 있나?'하고 늘 걱정하며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매일을 보냈었다. 그래서 방에서 나오 질 않았다. 나와봤자 따뜻한 가정의 느낌을 받을 수 없으니까. 한 번은 친구가 옆에 있는데 아빠에게 전화가 와서 받은 적이 있었다. 짧은 통화 내용을 듣고 친구가 하는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누구랑 통화한 거야?/ 아빠/ 아빠랑 통화한 거 맞아? 정말이야?/ 응, 왜?/ 사장님이랑 전화하는 거 같았어.
아직도 남편이 두고두고 하는 말이 있다. 연애 시절 연말이었다.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싫은 소리 듣기 싫어서 엄마가 좋아할 것 같은 미제 콜라겐 화장품을 이태원에서 어렵게 구해서 (당시에는 온라인 거래가 활성화되기 전이었다) 밤 12시가 되기 전 집에 도착했다. 힘들었지만 제시간에 도착했고 엄마에게 칭찬받을 생각에 나름 기분이 좋았던 이 인간은 환한 얼굴로 화장품을 내밀었다. '엄마가 좋아하겠지.'라고 기대하며. 그런데 돌아온 말은 이 인간의 심장에 화살을 꽂았다. "선물이라면서 포장도 안 하니? 이렇게 성의 없이 물건만 틱 주는 거야?" 대충 이런 식의 말이었다. 포장할 시간이 없었다. 포장을 해야 하나라고 솔직히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물건이 좋으니까. 그 뒤로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 화장품을 엄마가 내던졌는지 썼는지 모르겠다. 이 인간은 기억력이 참 좋은 편인데 자신의 경험, 특히 가족과 관련된 기억은 선택적으로 삭제된 것이 많다. 나중에 이 인간이 동생이랑 대화 중에 이 사실을 알고 '선택적 기억 상실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어쨌든 이런 기억 투성이었을 결혼 전 그 집에서의 생활은 청산했다. 결혼하고 나니 남편과 단둘이 편하게 있을 공간이 생겼다! 한숨 소리도 큰 목소리도 시끄럽게 떠드는 티브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방을 들락날락해도 좋았고 청소하지 않았다고 일방적으로 핀잔을 듣지도 않았으며 늘 이 인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사람이 생겼다. 트라우마 때문인지 티브이를 즐겨 보지 않았는데 이 남자 인간도 딱히 좋아하질 않았다. 집은 조용했고 음악 소리로 채워지는 시간이 많았다. 침대에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떠들다 보면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잠들 때도 종종 있었다. 이 인간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이었나? 여행 온 것 같기도 했고 MT에 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이래서 결혼을 하는 건가? 난 비혼주의자였는데 결혼이 이렇게 편한 거였어? 아직 생활 전선에 뛰어들기 전, 초보 가정주부, 초보 프리랜서, 초보 직장인, 초보 가장이었지만 이 시절은 참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