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눈이 푹푹 내리던 밤이었다.
세상이 소리 없이 무너지는 것 같은 밤.
차가운 기운이 창문 유리에 붙고,
가로등 불빛마저 흐릿해지던 그 시간,
나는 어딘가에 앉아
한 사람을 가만히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그 사람이 오기만을 바라며
그 자리를 지키는 마음 하나.
그 밤, 사랑은 그렇게
풍경과 함께 나를 감싸고 있었다.
소주 한 잔을 따르고,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본다.
눈이 내리는 풍경은 어딘지 따뜻해 보이지만
실은 그 안에 서 있는 사람은 꽤 춥다.
그 사람도 이 눈을 보고 있을까.
오늘은 어쩐지
그 사람이 오지 않을 리 없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마음 한쪽이 조금씩 기대고 마는 밤.
현실에선 멀어졌지만
마음속에서는
조용히 말을 걸어오는 사람.
이야기하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서 오래 머물고 있는 사람.
그 사람과 함께
아무도 모를 산골짜기로 숨어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세상은 자꾸 내게 싸우라고 하지만
그 싸움이 너무 지겨워졌다.
소박한 집 한 채.
출출이 우는 눈 덮인 골짜기.
그리고 그 사람.
꼭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런 풍경을 꿈꾸고 있다는 것만으로
지금 이 마음이 얼마나 깊은지를 안다.
사랑이라는 건
눈 오는 밤에 혼자 앉아
그 사람이 올지도 모른다는
아무 근거 없는 확신을 품고 기다리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손을 잡지 않아도,
벌써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내게로 오는 길이
눈 속에 묻혀서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오늘은 분명히 온다고.
그 사람이 오면
아무 말 하지 않고
그저 내 품 안에 안기게 해주고 싶다고.
세상의 모든 말보다
그 따뜻함 하나가
이 밤엔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눈은 끝도 없이 내리고 있었다.
가난한 마음,
쓸쓸한 밤,
조용히 불러보는 이름 하나.
나는 그 이름 속에서
다시 살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