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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히 Jun 05. 2022

분노와 손잡기

분노를 오래도록 붙잡고 있다.


멈췄던 순간들 07.

분노와 손잡기


분노를 오래도록 붙잡고 있다.     

분노라는 감정에 빠져있기보다 분노가 무엇인지, 왜 분노하는지, 언제 분노가 나타나는지, 분노한 나는 어떤지 분노를 가운데 두고 빙글빙글 돌며 유심히 살펴보는 쪽에 가깝다. 매거진 여름호 주제가 분노이기 때문이다. 곰곰 생각하다 내 인생에서 화가 많았던 시기가 떠올랐다.


열일곱 살이었고, 그때의 나는 뭐랄까 불안했다. 생이 나를 어디로 끌고 가는지 몰랐다. 내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불안했고, 그 불안에 끌려가기 싫어 내가 직접 생에 발을 걸었다. 네가 끌고 가는 대로가 아닌,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그 길은 대다수 사람이 걷는 길과 달랐다. 내가 가기 싫은 길이 또렷이 보였다.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길은 희미했다. 자퇴 후 여전히 불안했다. 생에 발을 걸었지만, 생이 또 내게 발을 걸었다. 어때, 이렇게 장애물이 많은데 네 마음대로 갈 수 있겠어? 확신이 없었다. 화가 났다. 스스로 화를 냈고, 주변 사람들에게 화를 냈고, 세상에 화를 냈다. 그런 시간이었다.


“네 안에 칼이 있어.”

내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 말을 열일곱 어느 날 불쑥 듣게 되었다. 심리검사를 해주는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칼은 네가 남을 해치게 할 수도 있지만, 너 자신을 찌를 수도 있어.”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부끄럽게도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나 스스로 망가트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나는 겨우 이렇게밖에 못 살았는데. 당시 나는 내가 못마땅했지만, 동시에 안쓰러웠다. 더 잘 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물었다.


“지금까지는 네가 익숙했던 생각과 행동으로 살아왔을 텐데, 그 반대편의 길을 가면 돼. 그 길이 잘 보이지 않을 테지만, 거기에도 길이 있어. 일단 너의 분노와 화해해 봐.”


아니, 화나는 일투성이인데 어떻게 분노와 화해할 수가 있지? 분노는 타오르는 거고, 화해는 손을 잡는 일인데! 그 말에 나는 또 화가 났다. 이런 타오르는 분노가 나를 집어삼킬 수도 있음을 직감으로 알았다. 정말로 내키지 않지만, 분노와 손을 잡아야 할 터였다.


우선 내가 써둔 일기장을 불태웠다. 속마음을 터놓을 곳이 없어 오랜 시간 일기장에 내 마음을 적었다. 분노가 내 안에 들어와 살고 있었기에 일기장에 욕이 많았다. 배설물과 다르지 않았다. 나는 내 감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다 싸지르게 두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으면서. 일기장에는 욕만 쓰여있지는 않았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일기장이 불타는 모습을 보면서 한 시절과 인사했다. 안녕.


대신 다른 것을 쓰기 시작했다. 감사일기. 화가 많은 내게 감사한 마음은 새와 다를 바 없었다. 관심도 없었고,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는. 처음에는 꼭꼭 숨겨 있어 보물찾기하듯 찾아야만 했다. 도대체 감사할 게 무엇이 있는가. 그래도 하루에 다섯 가지를 찾아 적기 시작했다. 겨우 적었던 다섯 개는 점차 쉽게 쓸 수 있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이후에는 귀 기울이지 않아도 새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처럼, 감사한 마음이 습관이 되었다. 감사하는 마음은 분노에 정반대에 있어서 분노와 사이가 멀어졌다.


그리고 용서하기 시작했다. 용서는 그 어떤 것보다 어려웠다. 용서하기 싫어 자주 울었다. 용서는 내 마음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 또한 포용해야 하는 커다란 마음이었다.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까지 용서하기엔 내 마음이 작았다. 아무도 용서하라고 한 적이 없었는데 혼자 울면서 노력했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고, 타인의 마음을 상상하고, 좋은 점을 찾으려 하면서 타인을 들여다보았다. 용서하지 않았으면서 억지로 용서한다고 말을 내뱉었다. 말을 내뱉으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봐. 이 과정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어느 순간 흐지부지되었지만, 분노의 마음을 누그러트리는 데 도움이 되었다. 스스로 미워했던 나 자신만큼은 용서할 수 있었다.


그러다 성인이 되었고, 이후로는 화를 이전만큼 내지 않았다. 내 삶의 책임은 내게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누구나 나와 비슷하게 힘든 시간을 지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많은 일에 ‘그럴 수 있지’, 마음을 가지게 되면서 화가 나는 일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분노는 내 안에서 타오르지 않았다. 나는 협정을 하듯 분노와 손을 꼭 잡았다.


그렇다고 분노가 사라진 건 아니어서 가끔 내 삶에 등장한다. 그럴 수 없는 일들을 목격할 때.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면 안 되는 일을 보거나 들었을 때. 화가 난다. 약자를 모욕할 때, 편 가르기로 갈등을 조장할 때, 인간답게 살려는 이의 목소리를 무시할 때,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을 때. 이런 화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분노에서 변화의 시작점이 생기기도 하니까.


이제는 생과 나란히 걷는 기분이 든다. 삶이 내게 발을 걸고 있지도 않고, 나도 내 삶을 이겨내려고 하지 않는다. 가끔 돌부리가 있어 넘어질 때도 있겠지만, 그저 거기 있던 것일 뿐. 내 안에는 여전히 칼도 있지만, 둥근 마음도 있고, 차가운 얼음도 있다. 여러 마음이 있고, 이 아이들과 나란히 잘 걷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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