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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문 Mar 25. 2024

20. 차의 향과 숲의 향

(작년 가을 썼던 글입니다. 지금 계절에 맞지 않아 생략할까 하다가 그때 촉촉히 젖은 숲의 향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서 다시 공유합니다.)


숲의 향

지난 이틀간 우박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다가 태풍 같은 바람이 불다가 맑게 개었다가 다시 비바람이 휘몰아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제 날씨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오후 4시 해가 서쪽으로 기울 즈음 남편과 뒷산에 올랐다. 이른 아침 등산도 맛있지만, 넘어가는 오후 햇빛이 비치는 숲도 분위기 있다. 집 주차장을 나오자 하교하는 아이들이 시끄럽다. 여고생들의 웃는 소리는 아이들 웃는 소리 다음으로 기분 좋다. 보도 위 낙엽들도 시끌벅적하였다. 듬성듬성 솔가루를 보자 아빠와 함께 뒷산에 올라 솔가루(솔잎)를 갈퀴로 긁어모으던 추억이 떠올랐다. 솔가루를 자루에 가득 담아 지게에 지고 아빠랑 함께 내려오던 일, 나뭇간에 쌓아 놓으면 암탉은 거기에 자리 잡고 알을 낳고, 솔가루 한아름 안아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시커먼 아궁이 속에서 작은 불씨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오솔길 내내 낙엽이 수북하다. 마치 흰 눈이 쌓인 듯하다. 암산이어서 건조할 때가 많은 뒷산인데, 비에 젖은 흙이 촉촉하니 숨쉬기 좋다. 요란한 비바람에 웬만한 나뭇잎은 다 땅에 떨어진 듯, 하늘은 이발한 아들 머리처럼 시원하다. 돌아올 즈음 숲의 향에 흠뻑 젖었다. 흙냄새와 각양 풀과 낙엽의 향이 조화롭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나뭇잎마다, 풀잎마다 향이 다르다. 숲길을 걷다 보면 이 지점에서 나는 향과 저 지점에서 나는 향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제 숲은 이 모든 향이 한데 어우러져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어떤 조향사도 이런 향을 만들지 못하리라. 오직 자연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향이다. 그동안 맛본 차의 향이 왜소하게 느껴졌다.

와유臥遊

차도 자연이 만들어준 것이지만, 차 향은 숲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에 견줄 수 없었다.  오래된 중국 동양화 중에 신선들이 등장하는 신선도나 자연 속에서 음풍농월하는 문인들을 그린 수묵화를 보면 화로 옆에서 불을 피우고 차를 준비하는 초동樵童을 볼 수 있다. 차를 마셔도 자연 속에 마시는 것이 더 좋았던 것을 알았던 것이다. 중국 송나라에 이르면 문인들이 한 계급으로 등장한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그들은 주로 관료직에 종사했다. 그러나 그들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 관료직으로 종사하는 것에 항상 불안과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종사하지만, 그럴수록 그들은 자연을 가까이하고 싶어 했다. 수묵의 문인화, 산수화가 등장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신선처럼 자연을 가까이하고 세상과 멀리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환경 속에서 그나마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은 산수화를 그려 방에 걸어두고, 그것을 보며 와유臥遊하는 것이었다. 식사 대용으로 차를 마시는 서민들과 달리 다도와 같은 차문화를 만들어낸 것은 자연을 가까이하지 못하는 문인들이 자연을 가까이하려는 몸부림에서 나온 것이리라. 자연과의 거리가 더 멀어진 우리 현대인은 차 한 잔 마시면서 자연의 향을 느껴보는 시간이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적당한 온도, 적당한 바람, 맑은 날씨, 다채로운 단풍의 가을, 시간을 내어 산속을 거닐고 잠깐 바위 위에 앉아 따스한 차 한 잔 마시고 내려온다면 더더욱 좋을 것이다.


중국 그림에서는 신선들과 함께 차를 준비하는 초동을 볼 수 있는데, 

우리나라 선비들이 모이는 계회도를 보면 차가 아닌 주로 술을 준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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