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후리랜서 작가 Jan 05. 2024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다(#1)

입사와 퇴사의 반복, 그리고 권고사직


300개.

내 연락처에는 300개가 넘는 기업의 전화번호가 등록돼있다.

모두 취업 준비생 시절에 등록한 번호로, 근 4년간 그중에서 면접을 본 곳은 50여 개가 아닐까 싶다.

달리 말하면, 나는 낙원을 찾아 50여 곳을 도망 다녔다.


취준생 시절, 나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하고 싶은 것 vs 할 수 있는 것 vs 남들이 으레 하는 것 vs 해야만 하는 것


학생 때부터 생각한 거지만, 나는 올인하는 스타일은 절대 아니고, 항상 접점과 경계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보험을 들어두는 편인데... 남들이 대기업, 공기업에 지원하니까 나도 지원해봤고(그리고 광탈했고), 글을 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워라밸을 지킬 수 있는 곳에 가점을 두었고(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느라 갖가지 질병을 얻었지만), 1년에 1천만 원은 저축하기 위해 최소한 최저시급 이상을 받고 싶었다(진작 글쓰기에 매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그렇게 내적갈등 때문에 저장된 연락처가 300개 넘는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면접 썰은 너무나 많지만, 이건 다음에 모둠으로 묶어 보기로. 


당시 취준생이라면 나처럼 직장을 찾는 데 오랜 시간을 보내고, 수십 곳에 면접을 봤을 거다. 취직하기 아주 어려웠으니까. 취업할만 한 '나쁘지 않은' 직장도 드문 편이었고. 하지만 내가 특히 문어발식으로 특정 분야에만 집중하지 않고 다양한 직종의 문을 두드렸던 건, 학생 때부터 누적된 보험의 습관화 때문인 것 같다.


경제학과를 전공했지만, 심리학을 공부하고 싶어서 복수전공으로 졸업했다. 심리학을 전공하지 않은 이유는 '심리를 공부해서 돈을 벌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석사까지는 따야 자격증을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때는 등록금도 없었고 공부할 에너지도 없었다. 결국 취준생을 끝냈을 땐, 동기들도 석사까지 졸업했다는 게 우스운 사실일 뿐.


취준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베스트는 글쓰는 일과 관련된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내가 사는 지역에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했다. 그 외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은 3가지로 보였다. 첫 째, 경제학을 전공했으니 총무나 경리 가 되는 것. 둘 째, 심리학도 전공하고 직업상담사 자격증을 갖고 있었으니 심리센터 또는 대학교에 근무하는 것. 셋째,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해왔던 입시 학원의 경력을 살려 강사가 되는 것. 


결론은, 두 가지는 경험해 봤다. 첫 번째는 나를 권고사직한 회사에서 경험해 봤는데, 적성에 너무 맞지 않는 일이라 학부 생활도 괴로웠지만, 실전에서는 더 괴로웠다. 이건 차후에 풀기로 하고... 세 번째는 총 2년 동안 정규직 강사로 일한 것 같다. 일 자체는 재밌었다. 지금 해도 재밌을 것 같다. 수업을 준비하고, 퀴즈를 내거나 시험을 치게 하고, 단어를 외우게 하고, 중간중간 아이들과 교감하며 친밀해지는 일. J인 나에게는 교재를 선택하는 것부터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기가 쎈 동료 선생님, 간혹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의 성희롱에 치이면서 26살의 병아리였던 나는 '좀 더 나이 먹고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또, 회사생활도 경험해 보고 싶었고, 그때가 아니면 취업하기 늦겠다는 판단이 있기도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생각이 많다.


그렇게 26살인가 27살인가에 첫 회사 취직했다. 나에게 베스트 선택지였던 '글쓰는 일과 관련된 기업'이었다. 물론 중소기업이었고, 최저시급이었으며 통근이 2시간 걸리기는 했지만, 이곳도 일이 재밌었다.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무엇보다 훗날 프리랜서가 되는 발판이 되어준 곳이다.


이곳에서는 교재를 만드는 일을 했다. 초등, 중등 ,고등학생 수준에 맞추어 상식 글, 기사를 집필하고 문제를 출제했는데, 내 적성과 아주 잘 맞았다. 전화를 받을 일도 많지 않았고, 인쇄 일정에 맞추어 바쁘게 일만 하면 됐다. 동료들도 모두 또래라서 점심시간도 편안했다. 



그런데 왜 그곳에 뼈를 묻지 않았는가?



당시에 '청년내일채움공제'라는 정책이 있었다. 한 중소기업에 2년 또는 3년 동안 근무하면 정부에서 회사와 근로자에게 지원금을 주는 제도였는데, 입사 당시에 청내공에 가입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가입하지 않음으로써 '이곳에서 2년을 근무하지는 않겠다'라는 의지를... 내보이고 말았다. 청내공은 일생에 단 한 번밖에 가입하지 못하니까. 


왜 가입하지 않았느냐 하면, 또 어떤 생각이 나에게 제동을 걸었느냐 하면- 그 지역에서 같은 업종은 하나도 없었다. 도권으로 가지 않는 이상, 이직은 할 수 없고 그래서 흔히 말하는 물경력이라는 생각이 가장 컸다. 차라리 경리가 되어서 이런저런 회사를 전전하는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만드는 교재가 단종될 기미가 보였다. 내 업무가 사라진다는 뜻. 또 다른 이유는 뭐, 회사생활이 맞지 않았다는 게 있다. '누구는 맞냐!'라며 나더러 배가 불렀다고 하겠지만, 지금은 그것만큼의, 때로는 그것 이상의 수입을 내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욕을 먹어도 기분 좋다. 더 나은 곳을 찾았으니까.


딱 1년을 채우고 퇴사했다. 그리고 직접 교재를 만들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열심히 일해도 남의 주머니만 채워주는 구나'라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때부터 프리랜서의 싹이 보였던 것 같다. 나는 성장하고 싶었다. 


퇴사 직전, 연차를 쓸 수 없었기 때문에 갈 곳을 정해놓고 이동하기는 힘들었다. 심지어 그때는 코로나가 한창 터졌던 시기. 퇴사 직후부터는 다시 면접을 대단히 많이 봤다. 대형 학원, 중형 학원, 취업상담소(나는 상담사 자격증이 잇으니까), 대학교 조교직 등등. 사실 근무 조건은 비슷비슷했다. 어차피 신입이니 최저시급이니까. 그런데도 워라밸, 상사의 성격, 이직하기 쉬운 직종인가, 이곳에서 퇴사하고 나면 나는 어떻게 돼있을까 등등에 집착하며 고민했던 건 사실, 이 모든 것들에 내가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다 마음에 안 드니까 하나라도 더 괜찮은 곳에 가려고...


학창시절에는 나름대로 반에서 5등,10등 안에는 들던 사람인데. 성실하게 산 편이었는데 어느 곳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했다. 내가 봐도 그때 나는 좋은 직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하는 순간에는 열심히하긴 하지만,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까. 요즘은 경제적 자유니 그런 말이 생겼지만..그땐 없었다. 그냥 회사에서는 반항아일 뿐.


어쩄든, 여러 곳에 면접, 간혹 입사 후 퇴사를 반복하다가 나도 면접에 지치게 되었다. 그중에는 정말 도저히 다닐 수 없는 곳이 더 많았다... 면접에 신물나고 평가를 그만 받고 싶었떤 그 때쯤! 훗날 나를 걷어차는 회사를 만나고 입사하게 된다. 그때는 새벽까지 일을 시키는 끔찍한 학원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는데, 집과 아주 가까운(도보15분) 중소기업에 취직하게 됐다. 집과 가깝다는 점이 모든 단점을 가려주기는 했다. 이를테면, 나와 거리가 먼 엑셀, 극보수적인 회사 분위기, 격주 토요일 오전 근무 등. 또래도 없어서 힘들긴 했지만, 애써 몸과 마음을 붙이려 노력했다. 무엇보다 청년내공을 신청했다! 2년 근속하겠다는 나의 큰 결심이었다. 하지만 4개월 정도 납부햇을 때인가. 느닷없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설 연휴 직전, 사장이 나를 따로 불러냈다. '적응은 잘 해 가느냐'라고 물었고,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라며 무슨 말을 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다. 충격을 크게 받아서 그런가. 처음 3초간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반사적으로 미소를 띠며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 같다. 직후에는 화장실로 갔다. 솔직히 애정이 있는 회사도 아니었고, 나도 2년 후에는 어떻게든 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냥 눈물이 나왔다... 고작 4개월 근무한 나도 아픈데, 권고사직은 정말 나를 부정당하는 기분이다. 하필 설연휴에 통보를 받았던 터라, 그날 생활용품 선물세트를 들고 집으로 걸어가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그리고 설만 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ㅋㅋ 여담이지만, 당시 엄마에게 권고사직 소식을 말하니... 회사에서 축 처져있지 말고 어깨 당당하게 펴고 있으라고 말해줬다. 감동이었고, 우리 엄마는 멋있는 사람이라는 걸 또 알게 됐다.


욕을 먹을까 봐 몇 자 덧붙이지만, 내가 일을 못한 건 아니다. 영수증 정리하려고 야근도 한 사람인데! 게다가 4개월 된 사람이 잘한다 못한다가 어디있냐고. 사실, 내가 들어오기 전부터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먼저 근무하고 있던 상사에게 들은 거지만, 일단 그 회사에는 대표가 둘이었다. A대표가 내가 들어오기 전에 있던 경리를 자르고, B대표가 나를 채용했고, B대표가 다른 회사를 차려 나가더니, A가 다시 옛날 경리를 불러왔고 나를 잘라버렸다. 나중에 안 거지만, 내가 잘리고 나서 원래 잇던 상사는 본인이 퇴사, 다시 불려온 경리도 정이 떨어졋는지 퇴사했다고. 



어쨌든, 4개월 만에 다시 면접을 전전하게 되었다. '앞으로 2년 동안은 면접을 안 봐도 되겠군! 2년 동안 조금씩 책을 내고, 2년 후에는 목돈을 받을 테니 결혼을 하든 해야겠당'라고 생각한 곳인데.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쎄게 배웠다. 


설 연휴는 충격에서 벗어나오는 데 썼다. 퇴사까지 보름 정도 말미를 줬기 때문에(법적으로는 30일을 줘야하지만!) 그동안 이력서를 뿌리고 다시 면접 준비를 했다. 주말에는 더는 새 공고도 올라오지 않고, 더 이상 할 수 있는 준비도 없었다. 한 마디로, 정당하게 시간이 남아 돌았다. 나는 일이 없으면 직접 만들어서 하는 인프제이기 때문에, 일단 노트북 앞에 앉아서 이것저것 하기 시작했다. 그 첫번째가 바로, 첫 회사 퇴사후에 만든 pdf를 책으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애 많이 썼던 첫 전자책)



이른바 전자책! 결과부터 말하자면, 여기에서 얻은 수입은 사실상 0원에 가깝다. 유페이퍼에서 승인을 받아 정식 ISBN도 발급받았지만, 최소 출금 가능 금액이 되지 않으면 내 통장으로 옮길 수 없다. 그렇다... 나는 이 교재로 '최소 출금 가능 금액'조차 벌지 못했다. 디자인부터 썩었다. 나는 디자인 감각은 0에 수렴하므로. (외주 맡길 걸... 하지만 그땐 돈이 없었잖아?) 그렇지만 아직도 자랑스러운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내 손을 거쳤기 때문인 것 같다. 정식 작가, 타칭 작가가 된 지금도 교재만큼 손을 많이 댄 적은 없다. 지금은 원고를 집필하고 나머지는 출판사에 맡기니까. 


당시에는 이 교재를 세상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가능하면 시급도 벌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머리를 굴렸다. 가볍게 시작한 얇은 교재라서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기에는 좀 민망했고, 그래서 경험치도 쌓을 겸, 전자책을 꿰했다. 일단 조악하지만 편집은 끝냈고, 문제는 이 교재를 어떻게 알릴 것인가?-였는데, 내가 선택한 건 펀딩과 인스타였다. 펀딩은 텀블러로 진행했다. 심사를 받는 과정이 그리 까다롭지는 않았다. 원고로 따지면, 시놉시스를 작성하는 느낌이랄까? 다만, 액수가 문제였다. 애초에 나는 이 교재를 아주 저렴하게 뿌릴 생각이었고(실제로 초반에는 100원에 뿌렸다), 펀딩이 가능하려면 50만 원은 달성해야 했다. 즉, 나는 100명을 모아야했다...  그래서 펀딩은 실패했다. 물론, 디자인이나 상품 소개가 매력이 없었겠지. 당시 텀블러에서 펀딩을 성공한 사례를 보면, 대체로 2030 여성의 필요를 자극하는 서비스가 다수였는데, 초등 학부모의 이목을 끌기에는 부족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시간이 남아 돌았던 내가 벌인 또다른 짓이 웹소설이었다. 옛날에 만든 비주얼 노벨 게임 스크립트를 웹소설로 만들어버렸다('글을 쓰고 처음받은 20원' 참고). 대사로만 전개되었던 스크립트를 문장으로, 문단으로 만들어 감정선을 연결하고, 출판사를 알아본 후 투고하고 계약하고, 다시 수정과 재수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출간되었지만. 내가 아직도 웹소설 작가로 활동하는 데 발판이 되어준 셈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벌인 짓은 크몽에 전문가로 등록한 거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써서 밥 벌어 먹고 사는, 더는 '자칭'이 아닌 '타칭 작가'가 되었다. 크몽의 높은 수수료에 대해 말이 많고, 나 또한 매출의 20%를 뜯기는 사람이지만, 솔직히 크몽이 열어준 경로가 너무나 많다. 애초에 크몽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회사를 전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크몽에 관해서는 앞으로 내내 이야기할테니 일단 미뤄두겠다.) 크몽에 전문가로 등록하려면 꽤 이것저것 필요한 자료도 많고 절차도 복잡하다. 미러캔버스를 통해 이미지를 만들고, 서비스 설명을 등록하고, 반려를 받고 다시 심사를 요청한다. 이 과정이 번거롭고 때로는 까다롭기도 했지만, 크몽에 가입한 건 그야말로 신의 한 수. 내 운명을 바꿔준 선택이었다.



아무튼, 요약하자면...

퇴사당한 후 취준하는 데 힘을 쓰지 않고, 하고  싶었던 걸 하는 데 시간을 쓰니까 또 길이 생겼다.

그동안 내가 한 것은 무엇이엇나 하하. 

만약 졸업하자마자, 아니, 졸업하기 전에 크몽에 등록하고 내가 하고 싶었던 글을 썼다면, 더 빨리 경제활동을 시작했을 지도 모르겠다.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고 하지만..

도망치다 보면 또 길이 있다.

남들이 가는 길만 길이 아닌 것을, 그때는 몰랐다.





작가의 이전글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다(#0)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